잠깐 상식 - 충무공 이순신 일대기
잠깐 상식 - 충무공 이순신 일대기
  • 김은하기자
  • 승인 2005.04.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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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은 숭고한 인격의 소유자인 동시에 지극한 충성과 막강한 통솔력을 지닌 위인이며, 우리나라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성웅이자 중구의 영웅이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일대기를 돌아보면 그의 업적과 나라를 위한 충의(忠義)를 느낄 수 있다.

충무공은 문반가문 출신이었음에도 어려서부터 무예를 즐겼으며 시재에도 밝았다. 31세 되던 1576년에는 식년 무과에 병과 급제해 함경도 동구비보권관(董仇非堡權管)에 임명된 뒤 여러 관직을 거쳐 1588년 조산보만호(造山堡萬戶)와 이듬해 녹도둔전관(鹿島屯田官)을 겸하게 됐다. 이곳에서 장군은 북병사 이일(李鎰)의 모함을 받아 첫번째 백의종군을 하게 되었다.

1589년 정읍현감이었던 장군은 전라도관찰사 이광에게 발탁돼 조방장(助防將)이 되었고 1591년 2월에는 서애 유성룡의 천거로 전라좌도수군절도사가 돼 거북선을 만드는 등 임진왜란에 대비했다. 1592년 4월 13일 왜적이 부산을 침략하자 장군은 5월 4일 첫 출전, ‘옥포대첩’을 시작으로 ‘한산대첩’ ‘부산대첩’ 등 크고 작은 전투에서 연전연승하고 전세를 역전시켰다.

장군은 이른바 ‘요시라 첩보사건’에 연루됐다는 이유로 1597년 3월 4일 투옥돼 4월 1일 출옥과 함께 두번째 백의종군의 길에 오르지만 원균이 거느린 수군이 7월 16일 칠천량 싸움에서 거의 전멸상태에 이르자 7월 22일 삼도수군통제사로 다시 임명됐다.

이후 8월 15일 보성(寶城) 열선루(列仙樓)에서 수군을 전폐하라는 조정의 밀지를 받고 “아직도 배 12척이 있고 신이 죽지 아니하였으니…”라는 장계를 올리고 9월 16일 ‘명량대첩’에서 10대1의 전력 열세에도 불구하고 적선 31척을 대파, 세계 해전사에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전과를 올렸다. 이듬해 왜적이 철수하게되자 11월 19일 남해 노량에서 벌어진 ‘노량대첩’에서 적선 2백여척을 부수고 54세의 일기로 순국했다. 이 때 장군은 “지금은 싸움이 한창 급하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유명한 유언을 남겼다.

장군은 글쓰기에도 능해 임진왜란 당시 전쟁 중에 쓴 일기인 난중일기를 비롯, 어머님을 찾아뵙기 위해 체찰사(體察使) 이원익에게 휴가를 청하는 눈물겨운 편지, 한산섬의 노래 등 여러 편의 시와 시조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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