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 이순신, 심해보다 깊은 충심으로 조선을 품다
충무공 이순신, 심해보다 깊은 충심으로 조선을 품다
  • 편집부
  • 승인 2015.04.22 1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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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대기·세계인의 평가·상식Q&A·탄신 기념 행사

이순신 장군 영정.

 

오는 28일은 충무공 이순신의 탄신 470년이 되는 날이다. 이순신 장군이 보여준 강직함과 명석함, 뛰어난 전술과 리더십은 아직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이순신 장군의 탄생지인 중구에서는 그의 탄신일을 기념하는 여러 행사를 개최하고 있으며, 중구 소재 충무아트홀에서도 충무공의 리더십 정신을 함양하는 이순신 지도자 과정을 운영하고 있다. 또한 지난해 7월 개봉한 영화 ‘명량’은 누적관객 1,761만3,682명으로 역대 1위로 우수한 흥행 성적을 보유하고 있다. 충무공 탄신일을 맞아 오랜 세월이 지나도 끊임없이 칭송받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정신을 그려볼 수 있는 일대기와 세계인들의 평가, 상식 Q&A 등을 간략하게 정리해보았으니,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정신을 다시 한번 살펴보도록 하자. (편집자 주)

 

■ 다시 살펴보는 충무공 이순신의 일대기

- ‘떡잎’부터 달랐던 어린 이순신의 전쟁놀이

이순신은 1543년 3월 8일, 양력으로 4월 28일에 지금의 중구 인현동인 한성의 건천동에서 태어났다. 덕수 이씨인 아버지 정과 어머니 초계 변씨 사이의 4남 중 셋째였다.

서울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면서도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는 성품이 아니었지만, 서애 유성룡과 함께 친분을 쌓은 것으로 전해진다.

유성룡의 ‘징비록’에 따르면 이순신은 어린시절부터 영특하고 활달했는데, 아이들과 함께 놀 때면 나무를 깎아 화살을 만들어 동리에서 전쟁놀이를 즐겨했다고 전해진다. 자라면서 활을 잘 쏘았으며, 무과에 급제해 관직에 나가려고 했고, 말타기와 활쏘기뿐만 아니라 서예에도 재능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그의 조카인 이분의 ‘행록’에서도 ‘어려서 놀 때도 늘 전쟁놀이를 하는데 모든 아이들은 반드시 공을 장수로 떠받들었다. 처음에는 두 형을 따라 유학을 배웠는데 재주가 있어 성공할 만도 했으나 매양 붓을 던지고 군인이 되고 싶어 하였다’고 이순신 장군의 성품을 설명했다.

이순신이 아산으로 이주할 때까지의 시기는 명확지 않지만 16세 또는 21세 전후로 여겨진다. 이는 일제 강점기때 신문에 연재된 소설 ‘임꺽정’ 내용에서도 이순신이 남산에서 아이들과 습진놀이를 하다 임꺽정을 만난다는 내용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소설가이자 당시의 지식인인 홍명희 작가도 이순신의 어린시절 활동지가 남산자락 밑인 건천동이었다는 사실을 주지한 것이다.

 

- 낙마 백의종군 등으로 고난스러웠던 초급 무관 시절

이순신은 혼인 후 28세가 되던 1572년 무과시험인 훈련원 별과에 응시하지만 낙마해 왼쪽다리가 부러지는 바람에 탈락하고 만다. 하지만 이순신은 옆에 있던 버드나무 가지를 꺾어 다리를 동여매고 일어나 끝까지 시험에 응했다.

결국 그는 서른 살이 넘어서야 식년시 무과에 병과로 급제해 관직에 나섰지만, 1583년 부친상을 당해 관직에서 물러난다. 그 후 1586년 사복시 주부로 다시 관직에 나서 곧바로 함경도 조산보 만호로 임명됐지만, 여진족의 습격을 당해 피해를 입으면서 경흥부사 이경록과 함께 감옥에 갇혔다. 이때 당시 이순신은 여진족을 토벌하면서 포로들을 많이 구출했지만 병사 이일의 허위보고로 백의종군의 처분을 받았다.

 

- 군사내실을 다지고 승리로써 우수함을 입증하다

1589년 이산해의 추천으로 다시 관직에 서게 된 이순신은 감사 이광의 군관으로 전라도로 파견됐다. 그해에 조방장과 선전관 등을 거쳐 정읍현감이 됐으며, 임진왜란 발발 14개월 전인 1591년에는 전라좌수사로 부임하게 된다. 이순신은 장차 일본군이 침략해올 것을 예견하고 군사훈련과 시설보수 등을 강화하고 거북선을 완성하는 등 전쟁에 만반의 준비를 다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우수사 원균의 요청을 받아 경상도 해역으로 출정하게 된다. 그해 왜군과의 해전에서 잇따라 승리를 거두는 데, 그 당시 해전이 옥포해전과 적진포해전이다. 이러한 공으로 이순신은 종2품 가선대부로 승진한다. 또한 왜군의 근거지인 부산포에서 왜군의 병선 100여척을 파괴해 조선 수군은 재해권을 장악하는 ‘부산해전’에서도 승리한다. 특히 부산해전은 다른 해전과 달리 적의 본진으로 직접 쳐들어가 대규모 함대를 포격하는 공세적인 작전이었다. 이 해전에서 이순신은 정2품 정헌대부가 됐으나, 아끼던 부하 장수인 녹도만호 정운을 잃는다.

 

- 외면 받은 그의 충심과 선견지명

이순신은 1593년 8월 한산도로 본영을 옮겼으며, 9월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됐다. 이듬해 3월 4일 당항포에서 왜선 30여척을 격침시켰고, 9월 29일에는 곽재우, 김덕령 등의 의병과 합세해 거제도 장문포에 주둔하던 왜군을 공격했다. 또한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 화의가 시작돼 전쟁이 소강상태로 접어들자 호남지역으로 피난오는 백성들을 보고 전쟁이 장기화될 것에 대비해 수군확보, 둔전경작, 무과실시 등으로 군사력을 증강시키고자 했다.

하지만 당시 붕당으로 갈라져 대립하고 있던 조정에서는 이순신과 원균의 갈등이 문제됐다. 조정은 원균을 충청 절도사로 옮겼지만, 조정 대신들은 원균의 편에 서서 이순신을 여러차례 탄핵했다. 이런 상황에서 명나라와 강화교섭을 하던 고니시 유키나가 가토 기요마사가 다시 조선을 침략하니 수군을 보내막으라는 계책을 조정에 전달했다. 이에 이순신에게 수군을 이끌고 출정하라는 명을 내렸지만, 왜군의 계략으로 큰 피해를 입을 것을 우려한 이순신은 출정하지 않아 파직당해 한양으로 압송됐다. 한 달 가까이의 투옥 생활동안 혹독한 문초를 받았고 4월 1일에 풀려나 권율의 진영에서 백의종군하라는 명을 받았다.

하지만 그가 옥에서 풀려나온 당시 원균은 일본군에 대패하고 말았다. 이에 조정에서는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한다.

그 당시 조선수군은 겨우 12척의 배가 남아있었고, 군사들은 아직 칠천량해전의 패배로 심신이 지쳐있는 상태였다. 이때 이순신은 장병들을 불러모아 “죽고자하면 살 것이고,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라는 말로 독려하고 전투 당시 스스로 선두에서 싸웠다.

13척의 배로 130척이 넘는 적선을 무찌른 명량해전으로 인해 일본군은 서해바다를 통해 북진하려는 작전을 포기해야 했다.

 

-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마라” 바다의 북극성이 되다

왜군은 1598년 8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철수를 준비했고, 명나라는 자신들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 이를 묵인하고 있었다. 이순신은 11월 19일 명나라 제독 진린과 연합해 노량에서 500여척의 왜군과 싸워 200여척의 적선을 불태우는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이 전투에서 이순신은 도주하던 적선을 추격하다가 유탄에 맞아 전사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당시 이순신이 “싸움이 지금 한창 급하니 조심하여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는 말을 전했고, 조카인 이완은 그의 죽음을 숨긴 채 전투를 독려했다고 기록돼 있다. 그의 부고를 들은 조정은 이순신에게 우의정을 추증했다. 1643년에는 ‘충무’의 시호를 받았고, 1659년에는 남해의 전적지에 그의 비석이 세워졌다. 또 1707년에는 충청도 아산에 세워진 그의 사당에 ‘현충’이란 호가 내려졌으며, 1793년에는 영의정으로 추증됐다.

이순신 장군 영정.

명량대첩도.

여수 충민사.

 

■ 이순신 상식 백과

Q. 이순신이 임진왜란 때 진중에서 쓴 일기의 이름은.

A. 난중일기.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76호로 지정됐다. 역사적 사실과 학술연구 자료로서 높은 가치가 인정되며, 전쟁 중 지휘관이 직접 기록한 사례인 만큼 지난 2013년 6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난중일기에는 인간 이순신의 모습과 생각, 부하를 사랑하고 백성을 아끼는 마음, 국정에 대한 솔직한 간언, 전투상황의 정확한 기록 등이 수록돼 있다.

 

Q. 거북선은 이순신이 처음 제작했다.

A. 거북선은 이미 오래전부터 있던 배였다. 신라시대 장보고가 동아시아의 바다를 지배한 청해진을 경영하면서 배 위에 방어용 등껍질을 씌운 독특한 전투선을 개발한 바 있다.

이 배는 속도가 빠르고 활이나 창을 이용한 적의 공격을 잘 막아냈으며, 마치 거북선과 흡사한 모습이었다.

실제 거북선은 고려 말부터 개발되기 시작했다. 조선 초기 태종과 세종 때에도 거북선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태종실록’ 13년 2월 5일 기록에 “임금이 임진강을 건너다가 귀선과 왜선이 서로 싸우는 모양을 구경했다”는 구절에서 알 수 있듯이 이순신 장군은 거북선을 처음 발명한 사람이라기보다는 거북선을 제대로 활용할 수 있는 전술을 개발한 사람이었다. 기존의 거북선 모양을 바탕으로 그 위에 철갑을 씌우고 여러 기능을 보완해 많은 대포를 장착할 수 있게 발전시킨 것이다.

 

Q.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마라” “죽으려고 하면 살 것이고 살려고 하면 죽을 것이다(필즉이생 생즉이사)”라는 명언을 남긴 대첩의 이름은.

A. 이순신 장군이 최후를 맞이한 대첩은 ‘노량해전’이며, ‘필즉이생 생즉이사’는 명량해전에서 남긴 말이다.

 

Q. 이순신 장군의 최초의 사당은.

A. 전라남도 여수시 덕충동에 있는 충민사이다. 이순신 장군의 사당하면 아산의 현충사, 통영의 충령사가 떠오른다. 하지만 현충사는 1706년, 충령사는 1973년에 건립했다. 충민사는 1601년 이순신을 추모하기 위해 통제사 이시언이 건립한 사우로, 이순신을 모신 최초의 사당이다.

 

■ 충무공에 대한 세계인들의 평가

“이순신은 서양 사학자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이순신은 전략적 상황을 널리 파악하고 해군전술의 비상한 기술을 가지고 전쟁의 유일한 참 정신인 불굴의 공격원칙에 의하여 항상 고무된 통솔원칙을 겸비하고 있었다. 그의 맹렬한 공격은 절대로 맹목적인 모험이 아니었다. 영국인에게 넬슨(Nelson)과 견줄 수 있는 해군제독이 있다는 사실을 시인하기는 힘든 일이지만 이순신이 동양의 위대한 해군사령관이라는 것은 틀림없는 일이다.” - 조지 알렉산더 발라드 (영국 해군 준장)

 

“내가 제일로 두려워하는 사람은 이순신이며, 가장 미운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좋아하는 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흠모하고 숭상하는 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죽이고 싶은 사람 역시 이순신이며, 가장 차를 함께 하고 싶은 이도 바로 이순신이다.” - 와키사카 야스하루 (임진왜란 참전 왜군 장수)

 

“예부터 장군으로서 묘법을 다한 자는 한둘에 그치지 않는다. 해군 장군으로서 이를 살펴보면 동양에서는 한국의 이순신, 서양에서는 영국의 Nelson(1758

-1805)을 들지 않을 수 없다. 불행히도 이순신은 조선에 태어났기 때문에 서양에 전하지 못하고 있지만 임진왜란의 문헌을 보면 실로 훌륭한 해군장군이다. 넬슨과 같은 사람은 그 인격에 있어서도 도저히 어깨를 견줄 수가 없다. 장군(이순신)의 위대한 인격, 뛰어난 전략, 천재적 창의력, 외교적인 수완 등은 이 세상 어디에서도 그 짝을 찾을 수 없는 절세의 명장으로, 자랑으로 삼는 바이다.” - 사토 데쯔라로 (일본 해군준장)

 

“나를 넬슨에 비하는 것은 가하나 이순신에게 비하는 것은 감당 할 수 없는 일이다.” - 도고 헤이하치로 (일본 해군제독)

 

“이순신은 청렴한 인물로, 그 통솔력과 전술능력으로 보나 충성심과 용기로 보나 이러한 인물이 실재(實在)했다는 자체가 기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이상적 군인이었다. 영국의 넬슨 이전에 있어서의 이름난 장수이기도 하거니와 세계역사상 이순신만한 사람도 없으며, 이 인물의 존재는 조선에 있어서까지도 잊히지 않겠지만, 도리어 일본 사람의 편에서 그에게 존경심이 계승되어, 명치유신 기간에 해군이 창설되기까지 하였으니, 그 업적과 전술이 연구되어야 한다.” - 시바 료타로 (역사 작가)

 

“고니시, 시마즈 등은 이순신이 죽은 줄도 모르고 싸우다가 또 패주했다. 이야말로 죽은 제갈(諸葛孔明)이 살아 있는 중달(仲達)을 쫓은 것이나 다름없다. 싸움이 그치자 그제서야 비로소 이순신의 죽음을 안 진린은 놀라고 배에 엎어지기 세 번이더니 탄식하기를 “실로 그만한 자 고금에 다시없다!”고 하였다. 죽음으로써 나라를 지킨 그 충렬(忠烈). 조선왕조는 쇠망하기 시작하여 300년 뒤 일본에 합병 되었다. 하나, 호걸 이순신의 영명(英名)은 천추에 길이 빛날 것이다.” - 아오야 나기 (‘이조사 대전’ 저자)

 

“도고가 혁혁한 전공을 세운 것은 사실이지만, 이순신 장군과 비교하면 그 발가락 한 개에도 못 따라간다. 이순신에게 넬슨과 같은 거국적인 지원과 그 만큼의 풍부한 무기와 함선을 주었다면, 우리 일본은 하루아침에 점령을 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대단히 실례인 줄 알지만, 한국인들은 이순신 장군을 성웅이라고 떠받들기만 할 뿐 그분이 진정으로 얼마나 위대한 분인가 하는 것은 우리 일본인보다도 모르고 있는 것 같다.” - 가와다 고오 (일본 해군 전략 연구가)

 

■ 충무공 이순신의 탄생지에서 개최하는 축제 … 4월 28일 남산골 한옥마을

중구, 서울 유일한 ‘충무공 탄신 기념 다례’ 개최

중구는 충무공 탄신일인 오는 28일 오전 10시30분부터 남산골 한옥마을에서 기념 다례를 연다.

기념 다례에 앞서 식전행사로 국악, 태권무, 전술연 시연이 펼쳐지고, 중구 관내 각 초등학교에서 선발한 소년소녀 이순신 24명에게 표창장을 수여한다.

특히 이번 다례에서 15개 동이 준비한 제사상 음식 15종을 차례로 진설하며, 음식 준비과정과 식재료 원산지, 손질 방법 등을 상세히 함께 소개한다.

이날에는 덕수 이씨 13대손이 이순신 장군의 영정을 봉안하고, 최창식 구청장이 초헌관을, 김장환 중구문화원장이 아헌관을, 손영택 중구노인회 부회장이 종헌관을 맡아 분향과 술잔을 올리는 헌작을 행한다. 이규현 한국예정교육학회 회장이 축관을 맡아 축문을 낭독한다.

또 다례가 진행되는 동안 남산골 한옥마을에서는 이순신 장군의 전술연을 전시한다. 전술연은 임진왜란 당시 뱃길로 한나절 이상 소요됐던 진영들 간의 신속한 연락체계를 위해 마련한 수단으로 사전교육을 통해 31개 그림 형상의 암호로 만들어 작전지시를 내렸다.

이와 더불어 이순신 장군에 대한 세계인의 평가와 충무공의 생애를 담은 배너 14개를 한글, 영어, 중국어, 일어 등 4개 국어로 제작해 전시할 예정이다.

서민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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