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독립운동가 - 김구
이달의 독립운동가 - 김구
  • 인터넷편집부
  • 승인 2019.08.20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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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격: 대한민국장
서훈년도: 1962년

1904년 애국계몽운동
1919년 상해로 망명, 임시정부 경무국장 취임
1931년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의열활동 지휘
1940년 임시정부 주석

 

김구 선생은 1876년 7월 11일(양력 8.29) 황해도 해주(海州) 백운방(白雲坊) 텃골(基洞)에서 태어났다.

유학자 고능선에게 한학을 배우면서 중국을 왕래하던 중 1896년 3월 황해도 안악의 치하포에서 명성황후 시해에 대한 복수로 일본인 쓰치다를 처단 후  옥고를 치렀다. 1904년 신지식인을 길러내는 애국계몽운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황해도 문화군 초리면(신천군 초리면)의 서명의숙(西明義塾)과 안악의 양산학교(楊山學校) 교사, 재령의 보강학교(保强學校) 교장 등을 지내며 교육 구국운동에 힘을 쏟았다. 최광옥과 함께 해서교육총회(海西敎育總會)를 조직하여 학무총감(學務總監)에 추대되어 각 군을 돌며 계몽운동을 펼쳤다.

선생은 1910년 신민회에 가입하여 구국운동을 전개했다. 1911년 일제에 붙잡혀 징역 2년 형을 언도받고, 안명근 사건에 연루되어 15년 형이 추가되어 옥고를 치르다 1915년 가출옥됐다.
1919년 3·1운동 직후, 중국 상하이로 망명해 대한민국임시정부 경무국장에 임명됐다. 임시정부 요인 경호 등을 맡았고 내무총장과 국무령, 국무위원 등을 지내며 임시정부를 이끌었다.
1931년에는 임시정부가 조직한 한인애국단을 맡아 일왕 처단(이봉창), 조선총독 처단(이덕주·유진식), 관동군사령관 처단(유상근·최흥식) 등을 지휘했다
1933년 장제스 총통을 만나 한인청년을 장교로 길러내는 길을 열었다. 뤄양(洛陽)에 있던 군관학교에 한인청년들을 장교로 길러낼 특별반을 만들고, 만주에서 독립전쟁을 벌이던 이청천?이범석?오광선 등을 초빙하여 장교 양성에 주력했다.
1940년 충칭에 정착해 한국독립당의 집행위원장, 광복군 통수권자, 임시정부의 최고 지도자인 국무위원회 주석으로 활동했다. 같은해 9월 한국광복군을 창설하고 국내 진입작전을 추진했다.

1945년 11월 임시정부 요인 1진과 함께 환국했다. 오로지 통일국가 수립을 위해 애쓰시던 선생은 1949년 6월 26일 경교장(京橋蔣)에서 안두희의 흉탄에 서거했다. 선생의 유해는 온 국민의 애도 속에 국민장으로 치러지고 효창공원에 안장됐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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