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역사- 태조 이성계 1394년, 서울 조선의 수도로 확정
특집]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역사- 태조 이성계 1394년, 서울 조선의 수도로 확정
  • 인터넷편집부
  • 승인 2019.08.20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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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서울의 이름은 "남경"
서울 한양도성 원경
서울 한양도성 원경

 

본지는 창간 26년을 맞이하여 세계적인 도시 서울시를 재조명하고자 총 4회에 걸쳐 서울의 역사를 게제한다.

2. 중세 서울

신라를 귀속시키고 후백제를 정복하여 후삼국을 통일한 왕건은 고구려의 후계자란 뜻으로 ‘고려’ 란 이름으로 나라를 세웠다. 당시 서울은 ‘양주’란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지만 편리한 교통과 풍부한 물산 등 유리한 자연지리적 여건 때문에 1067년 고려 제방 제도상 최고 지위 중 하나인 ‘남경’ 으로 승격된다. 이후 다시 양주로 격하되었다가 남경으로 격상되는 변화를 겪었지만 1101년 이후부터 고려말까지는 남경으로 승격되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고려말 공양왕 당시, 왕조가 혼란스러워지자 난세를 타계하기 위해 당시 ‘한양’이라 불렸던 서울로 수도를 이전하지만 정치상황이 더 불안해지는 바람에 6개월 만에 개경으로 다시 수도를 이전하는 혼란을 겪는다. 이성계가 조선을 세우고 한양을 수도로 지목하면서 서울은 조선의 수도로 거듭나게 된다.

한양, 조선의 수도로 천도

태조 이성계는 1392년 7월 조선을 창건하고, 1394년 한양을 조선의 수도로 확정한다. 1395년 경복궁과 종묘·사직단이 준공되고 1405년 창덕궁이 낙성되면서 한양을 중심으로 한 실질적인 조선 왕조 500년의 역사가 시작된다. 조선은 수도 한양을 보호하기 위해 백악(북악산), 낙산, 목멱산(남산), 인왕산을 따라 약 18킬로 미터의 성곽을 쌓았다. 석성과 토성으로 쌓은 성곽에는 4대문과 4소문을 두었다. 4대문은 동의 흥인지문 ·서의 돈의문 ·남의 숭례문 ·북의 숙정문이고, 4소문은 동북의 홍화문 ·동남의 광희문 ·서북의 창의문 ·서남의 소덕문 이다. 왕의 생활공간이자 통치공간인 궁궐로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경운궁을 지었다. 이 곳을 조선의 5대궁이라 하며 조선의 왕이 가장 오래 살았던 곳은 창덕궁이다.

조선시대 통치기구는 의정부·이조·호조·예조·병조·형조·공조를 비롯한 육조와 사헌부·사간원 등의 특수기관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오늘날 광화문 앞 세종로에 육조가 모여 있었고, 이를 육조 거리로 불렀다. 오늘날의 국립대학으로 볼 수 있는 최고 학부인 성균관과 중등교육 기관으로 볼 수 있는 4부 학당도 사대문 안에 위치하는 등 서울은 명실공히 조선 정치·행정의 중심이었다. 현재 우리나라 사적 제125호 이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종묘에서 왕과 왕후의 신주를 모시고 매년 제례를 지냈고 광화문 서쪽 인왕산 자락에 위치한 사직단에서 곡물신에게 풍년을 기원하는 사직제를 매년 거행했다.

종묘대제
종묘대제


조선시대에는 청계천을 중심으로 북쪽을 북촌, 남쪽을 남촌이라 불렀다. 북촌은 종로구 가회동 일대를 지칭하는 것으로 양반 관료들이 모여 살았고 남촌은 중구 필동을 중심으로 가난한 선비들과 서민들이 모여 살았다. 그 중간에 종로가 있는데 종로에 상인들이 장사를 하는 시전이 위치해 있어서 도성 경제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지금 서울의 중심인 한강은 전국에서 거둔 세금을 서울로 운송하는데 큰 역할을 했고, 급한 소식을 알려야 할 때는 남산 봉수에 연기를 피워 소식을 전했다. 지리적으로 동아시아 중심에 위치한 탓에 조선은 동북아시아 각국과 긴밀한 대외관계를 유지했고, 이에 따라 서울에는 각국의 외교 공간들이 있었다. 중국 사신들이 머문 곳은 태평관(現 국민은행 서소문지점 위치)과 모화관(現, 서대문구 현저동)이었고 일본과 남방국가 사신들은 동평관(現, 중구 인현동 2가 192번지), 만주 여진족은 북평관(現, 이화여자대학교 부속병원 위치)에서 머물렀다.

북촌 종로구 가회동 골목길
북촌 종로구 가회동 골목길

 

조선 후기 서울, 폐허를 딛고 문화의 꽃을 피우다. 

1592년 일본의 침략으로 시작된 7년간의 조일전쟁(임진왜란)은 조선에 큰 전쟁의 상흔을 남겼다.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이 모두 불탔고 사대문내 백성들의 민가 70~80퍼센트가 불타 없어지는 등 전쟁으로 인한 피해는 매우 컸다. 뒤이어 1624년 이괄의 난, 1636년 병자호란이 발생하면서 서울은 많은 피해를 겪었고, 도성 안은 청군의 노략질로 텅텅 비게 되었다. 이후 조선은 흩어진 민심을 바로 잡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고 가장 먼저 군사제도를 개편하고 도성을 보수했다. 숙종 때에는 도성의 무너진 부분을 수축하고 북한산성을 축조하는 등 도성의 방위 체계를 보다 확실하게 수립 하였다. 한편 조선 왕실은 전쟁으로 불탄 경복궁 대신 창덕궁과 창경궁을 먼저 재건했고 조선 후기 왕들은 창덕궁과 경덕궁을 오가며 생활하게 된다.

창경궁 명정문
창경궁 명정문

 

조선 후기가 되면 종로 중심인 시전상인에서 벗어나 중구 청계천변 일대, 동대문 이현과 남대문 칠패 시장까지 상업지역이 확대된다. 또한 한강의 용산·마포·서강·송파 등 포구를 중심으로 한 경강상인들의 활약도 두드러졌다. 조선 초부터 정치·경제의 중심이었던 서울은 전국 최대의 수공업 단지이기도 했다. 수공업단지는 주로 종로구와 중구 일대에 집중해 있었는데 종로구에는 왕실 의복을 만들던 상의원과 음식과 음식 담는 그릇을 만들던 사옹원이 있었고 창의문 밖에는 종이를 만들던 조지서 등이 있었다. 이러한 수공업의 영역이 조선 후기에는 도성 밖으로 확대되면서 조선 경제를 활성화하고 서울이 조선 후기 상공업도시로 발전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새롭고 실용적인 학문을 추구하는 실학이 젊은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형성되기 시작했고 청나라의 앞선 문물을 받아들이자는 북학파가 탄생하게 된다. 실학의 대두로 인해 서양의 과학기술이 조선에 들어왔고 천주교 사상이 함께 전파되기도 했다. 초기 천주교는 학문적 차원에서 연구되다가 차츰 신앙으로 발전했으나 성리학적 세계관을 부정하는 교리 때문에 결국 박해를 받았고 현재 양화대교 옆 잠두봉에서 많은 천주교 신자가 처형되었다.

잠두봉
잠두봉


조선 후기에 크게 변했던 또 하나는 신분 체계였다. 산업 활동이 다변화되고 경제생활이 진전되면서 사회계층 간 신분 이동과 신분 분화가 활발해지면서 농민이 양반으로 승격되는 일이 빈번 해지고 노비 해방이 본격화 되었다. 급변하는 시대상황에 따라 문학과 예술에도 많은 변화가 나타났다. 문학으로는 정치부패와 사회 모순을 비판하는 허균의 홍길동전, 작자미상의 전우치전, 사실적인 언어표현을 한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 등이 발표되었고, 그림으로는 우리나라 산천을 그대로 그리는 진경산수화 화풍이 유행 했다. 일반 서민들의 생활풍속이나 여인들의 생활상을 그린 풍속화도 크게 유행했는데 대표적인 풍속화가로는 단원 김홍도와 혜원 신윤복을 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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