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역사, 문을 열고 국제무대로 나서다
[특집]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역사, 문을 열고 국제무대로 나서다
  • 인터넷편집부
  • 승인 2019.09.04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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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지는 창간 26년을 맞이해 세계적인 도시 서울시를 재조명하고자 총 4회에 걸쳐 서울의 역사를 게제합니다.

 

근대 서울  

1895. 10. 8 을미사변
1897. 10. 12 대한제국 선포


1592년 임진왜란으로 불탄 후 270년이나 방치되어 있던 경복궁은 1868년에야 중건되었다. 경복궁 중건은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이 오랜 세도정치로 약화된 왕권을 회복하고 나라를 바로 세우기 위해 진행했던 것이다.
조선을 향한 서구 열강의 끈질긴 개항 요구와 침입이 있었고, 조선은 프랑스군과 미국군이 침입한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격퇴하기도 했지만 결국 1876년 부산·인천·원산 등의 항구를 개방했고 서구 열강과 조약을 맺었다. 당시 조약 내용을 보면 관세 주권에 제한을 두는 등 불평등한 내용이 많았다. 이에 따라 조선의 상권이 외국 상인의 수중으로 넘어가는 일이 많아지고 일반 서민의 생활이 곤궁해졌다. 일본이 청일전쟁, 러일전쟁에 승리하고 대한제국의 금융과 재정을 장악하면서 조선 상인들의 몰락이 가속화 됐지만 국채보상운동, 식산흥업운동, 근대교육운동에 적극 참여하는 등 조선의 상권을 지키기 위한 노력도 끊이지 않았다.

 

운현궁 이로당
운현궁 이로당


1870년대 중반 무렵 한성의 젊은 양반들 사이에 개화사상이 퍼지면서 하나의 세력이 형성되었다. 그 중 김옥균 등의 무리가 청 세력을 몰아내고 개혁을 단행하기 위해 1884년 12월 4일 우정국에서 갑신정변을 일으키고 신정권을 수립하지만 청군의 공격에 의해 삼일천하로 막을 내리게 된다. 갑신정변이 일어난 우정국 옛터는 현재 박물관으로 보존되어 있다.
1895년 5월 삼국간섭이후 조선에서의 일본의 위신이 급격히 추락하자 일본은 그 배경에 명성황후가 있다고 판단한다. 이는 명성황후시해사건(을미사변)의 발단이 되어 1895년 10월 8일 일본군은 고종과 명성황후가 머무는 건청궁을 습격해 명성황후를 살해한다. 명성황후 시해로 인해 여론이 악화되자 일본은 범인인 미우라 공사 등을 구금하지만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모두 석방해 버린다. 명성황후시해사건 이후인 1896년 2월 11일, 고종은 궁녀들이 타는 가마에 몸을 숨기고 정동에 있는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하는데 이것이 아관파천이다.

 

우정총국
우정총국


조선이 자주독립국임을 알리기 위해 고종은 1897년 10월 12일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정하고 대한 제국 초대 황제로 즉위한다. 근대국가로 가기 위해 교육과 산업을 육성하고 전기·전차·전화·철도 등 근대문명을 활발히 도입하면서 서울시민들의 생활을 많이 바꾸어 놓지만 일본 등 외국 세력의 간섭이 심하여 근대국가 수립까지는 나가지 못했다.
자주독립국이 되기 위한 조선의 염원은 서울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서울 사직터널 밖의 독립공원이다. 그 곳에는 독립문과 독립관, 서재필 동상이 있다. 독립협회를 만든 서재필은 중국 사신을 영접하던 영은문을 부수고 독립문을 세우고 최초의 한글신문 <독립신문>을 창간했다.
서울에서 처음 전차가 운행된 것은 1899년으로 빠르고 편리한 기능 탓에 도시교통수단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 1900년 한강철교가 가설된 후 철도는 전국으로 뻗어 나갔고 1930년대 말에는 한반도 내륙 산간지역까지 철도망이 확대되었다. 철도의 도입으로 보름이 걸리던 서울과 부산이 하루면 갈 수 있었고, 남녀노소가 몸을 맞대고 앉아 담소를 나누는 평등사회를 만들었지만 이러한 문명의 이기들은 대부분 제국주의 열강들이 대한제국을 침략하는 과정에서 들어온 것으로 제국주의 열강의 침탈을 돕는 역할을 했다.

 

독립문
독립문

 

민족독립운동기 서울, 시련을 겪다
1905. 11. 17 을사늑약

덕수궁 근처 골목길 안쪽으로 가면 1900년 러시아 건축가가 지은 최초의 서양식 2층 벽돌 건물인 중명전이 있다. 중명전은 1905년 11월 대한제국이 일본제국과 을사늑약(을사조약)을 맺은 곳 이다. 황제의 옥쇄도 날인되지 않고 무력으로 맺은 조약에 반발해 장지연은 황성신문에 “시일야 방성대곡”이란 사설로 협약의 부당함을 토로했고 민영환은 협약에 항거하여 자살하고 안중근 의 사가 만주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는 등 전국 각처에서 반일 여론이 확산되고 일본을 처단하려는 의병투쟁이 크게 번져갔다.

일본이 한성부를 경성부로 개칭한 후 일본인들이 대거 유입되면서 서울의 인구밀도가 높아졌다. 조선총독부는 일본인들이 집중적으로 모여 살던 남대문로와 을지로, 충무로 일대를 중심으로 서 울의 도로와 구역을 개수한다. 그러나 한국인이 다수 거주하는 종로 북쪽은 개발을 진행하지 않았다. 또한 일본은 식민 통치 권력의 위엄을 과시하기 위해 서울 곳곳에 서양식 건물을 건설하고 전시 공업화를 위해 용산과 영등포 일대에 중화학공장을 대거 건설했다.

 

서울역
서울역


서울에 일본인 거주자와 기업가가 늘어나면서 지금의 명동에 미쓰코시 백화점 경성지점이 1906년 열렸고 1920년대에는 죠지아 백화점, 미나카이백화점 등이 명동과 충무로 일대에 집중적으로 들어섰다. 조선시대 육의전이 밀집해 있던 종로에는 한국인 최초로 박흥식이 1931년 화신백화점을 열었고, 1934년에는 전국에 체인점을 개설하고 37년에는 지하 1층에서 6층까지 엘리베이터를 설치한 초현대식 건물로 변신하면서 장안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경성의 변화에 따라 서울시민들의 생활 모습도 많이 바뀌었다. 북촌에는 전통 한옥 대신 문간방과 사랑방이 없어진 개량 한옥이 늘어났고 커피나 맥주를 파는 카페, 케익이나 카스테라 같은 고급빵을 파는 곳도 등장했고 거리에는 국화빵이나 중국식 호떡을 파는 곳도 생겼다. 전기도 일반 가정으로 보급되었고 1910년대에는 가로등이 켜질 정도로 전기 사용이 일상화 되었지만 이는 일부 지역에 국한된 것으로 대부분의 서울 사람들은 1930년대까지도 밤에 호롱불을 밝히고 장작으로 취사와 난방 연료를 대체했다. 1920년대 들어서는 전차가 대중교통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고 9인용 승합택시도 등장했다.

 

화신백화점
화신백화점


대한제국을 패멸한 후 일본은 동 이름도 일본식으로 바꾸는 등 조선의 흔적을 없애기 시작했는데, 특히 궁궐을 많이 파괴했다. 경복궁이 첫 번째 대상으로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를 연다는 명 목 하에 경복궁의 수많은 전각을 헐고 부지를 파헤쳤다. 1929년에는 다시 대규모 조선박람회를 개최하면서 건청궁 등의 전각을 다수 헐었고, 박람회가 끝난 후에는 그 자리에 조선총독부 청사 를 건립했다. 경복궁의 훼손 뿐 아니라 창덕궁을 통감부 간부와 친일 인사들의 연회장으로 바꾸면서 주변 전각을 허물었고, 창경궁에는 동물원과 식물원을 만들어 이름마저 창경원으로 바꾸었다.

 

조선총독부 신축공사
조선총독부 신축공사


일본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1919년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대한독립만세의 함성이 터졌고 이는 한반도 전체와 만주 및 미주 한인사회로까지 확산되었다. 3·1운동은 나라 안팎에서 전개되는 항 일민족 운동의 촉매 역할을 했고,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게 했다. 하지만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1907년 건립된 서대문형무소에 감금되고 목숨을 잃기도 했다. 서울은 독립운동과 민족운 동이 끊이지 않았던 곳으로 의열단원 김익상이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던지기도 하고 김상옥이 종로경찰서를 습격하기도 했다. 암살과 파괴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의열단은 향후 군대를 창설해 항일독립전쟁을 벌이는 방향으로 노선을 수정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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