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기획- 서울의 중심 중구의 역사 1
특집기획- 서울의 중심 중구의 역사 1
  • 인터넷편집부
  • 승인 2019.10.01 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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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구 동네방네 이야기 시리즈

본지는 최근 창간 26주년을 기념하여 세계적인 도시로 발돋움하고 있는 서울시의 역사를 총 네 차례에 걸쳐 재조명해보았다. 서울 역사 고증 활동에 탄력을 받은 본지는 이번에 더 세부적으로 들어가 서울의 중심도시로 자리매김한 중구의 역사를 동별로 묶어 소개해보기로 했다. 
         
1 소공동과 북창동의 역사
◆소공동(小公洞)
소공동은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을 마주보고 위치했던 까닭에 왕조의 운명과 흥망성쇠를 같이했다. 조선시대 남부 호현방의 일부 지역이었고, 영조 27년(1751)에 편남부 호현방 송현계 궁내계에 속하였으며, 갑오개혁 당시 5부가 5서로 바뀔 때 남서(南署) 회현방 소공동계 소공동, 송현계 송현동, 저경궁계 저경궁동, 미동계 석정동지역이었다. 이듬해 칙령 제36호로 5부로 환원됨에 따라 남부 회현방에 속하였다.   
그 뒤 1914년 경기도고시 제7호에 의해 소공동은 남부 송현동 석정동 각 일부와저경궁동을 합하여 장곡천정이라 하였는데, 이는 1904년 러일전쟁 때 대한제국의 영빈관인 대관정 터에 조선군사령관이었던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가 거주했다고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1943년 부령 제163호에 구제도를 실시하면서 중구 장곡천정이 되었다. 1946년 일제식 동명을 없앨 때 소공동으로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소공동의 관할구 경계(좌)와 소공동주민센터(우)
소공동의 관할구 경계(좌)와 소공동주민센터(우)

소공동은 동쪽으로 남대문로2가, 남쪽은 남대문로3가 및 북창동과 접하고 서쪽은태평로1가, 북쪽은 을지로1가와 연해 있다. 소공로와 북창길이 동의 서남부를 교차하며 지나는 소공동은 서울에서도 상업ㆍ업무중심지구로 노른자위에 해당되는 곳이지만 조선시대에는 궁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리했던 까닭에 왕실 소유의 땅이 대부분이었다. 소공동 87번지 자리는 태종의 둘째 딸 경정공주와 부마 조대림(趙大臨)의 집이 있었기 때문에 작은공주댁, 또는 소공주댁이라 불렸다. 이후 선조 16년(1583)에 궁을 화려하게 지어 셋째 아들인 의안군(義安君)에게 주었으나 선조25년(1592)임진왜란 때 왜군의 진지로 사용되었다. 이듬해 명나라 장군 이여송이 왜군을 쫓고이곳에 거처하였고 또 이후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던 곳이 되어 남별궁이라 하였다.
조선시대 이곳 풍경을 알 수 있는 것은 없고 다만 자연부락 명칭에서 옛날을 추정해 볼 뿐이며 지금은 서울에서도 가장 도심 한가운데이고 재개발사업이 이루어져 자연부락의 위치 확인은 어렵다. 돌우물골은 소공동, 태평로2가, 을지로1가에 걸쳐 있던 마을로 돌 틈에 나오는 우물이 있었으므로 붙여진 이름인데 한자로는 석정동(石井洞)이라 하였다.
솔고개는 소공동, 북창동, 남대문로2~3가에 걸쳐 있던 마을로 소공동 111번지 부근의 고개에 소나무가 울창하게 들어서 있어 솔고개 또는 송현(松峴),송현동이라 하였다. 종로구에 있던 송현과 구별하여 남송현이라고도 불렀다.
저경궁골은 선조의 다섯 째 아들 원종(元宗)의 잠저로 송현궁이라 하다가 영조 때원종의 생모인 경혜유덕인빈(敬惠裕德仁嬪) 김씨의 신위를 봉안하여 사당을 이곳에 옮기고 저경궁(儲慶宮)으로 고치자 그 이름을 따서 붙여진 이름이다. 저경궁은 고종 7년(1868) 계동의 경우궁 별묘로 옮겨졌으며 경우궁과 함께 1883년에 옥인동으로 옮겨졌다가 1908년 7월 궁정동에 있는 육상궁(毓祥宮) 경내로 옮겼다. 남아 있던 송현의 저경궁 터는 국유화되면서 1927년까지 건물이 남아 있었는데 경성치과전문학교를 건축하면서 철거되었다.

2018 소공동마을축제 중 '마법놀이터' 공연 모습
2018 소공동마을축제 중 '마법놀이터' 공연 모습

소공동은 청일전쟁(1894)을 고비로 하여 청의 원세개(袁世凱)가 이끌고 온 중국인들에 의해 화교촌이 들어섰으며, 그 뒤 일본 제국주의 세력이 밀어닥친 1910년 이후부터는 이 마을에 조선호텔을 비롯해서 경성부립도서관, 경성상업회의소, 경성치과전문학교. 콜롬비아레코드회사, 빅타레코드회사 등이 들어서면서부터 산업과 문화의 중심지로 자리를 잡아갔다.
1960년대 이후부터 소공동은 한국의 은행거리라 불릴 만큼나라 안팎의 은행이 밀집되어 들어서기 시작하였고 1970년대 이후부터는 은행을 중심으로 대기업 본사와 무역회사, 변호사, 회계사, 건축설계사 등의 사무실, 여행사, 호텔을 비롯하여 갖가지 협회가 이곳에 자리 잡았다.
소공동 87-1번지에는 사적 제157호로 지정되어 있는 환구단(?丘壇) 터가 있다.
1897년(광무 원년), 러시아 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 환궁한 고종은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선포하고 환구단에 나아가 천지에 고하는 제사를 드린 후 황제에 즉위했다. 당시 환구단이 마련된 곳은 중국 사신들을 접대하던 남별궁(南別宮)이 있던 자리로, 이때 만들어진 환구단은 화강암으로 된 3층의 단이며, 중앙 상부는 금색으로 칠한 원추형(圓錐形)의 지붕이었다.
환구단에는 하늘과 땅, 별과 천지만물에 깃든 신의 신위(神位)를 모시고 동지나 새해 첫날에 제천 의식을 거행하였다. 그러나 1912년 일본은환구단을 헐고 그 자리에 총독부 철도호텔을 세웠다.

소공동 87-1번지에 있던 환구단과 황궁우. [현재 웨스턴조선호텔 위치]
소공동 87-1번지에 있던 환구단과 황궁우. [현재 웨스턴조선호텔 위치]

황궁우(皇穹宇)는 화강암 기단 위에 세워진 3층의 팔각 정자로, 환구단이 조성된 2년 후인 1899년(광무 4년)에 환구단 북쪽에 건립하여 신위판(神位版)을 모셨다. 황궁우의 건물 내부는 통층(通層)으로, 3층은 각 면에 3개씩의 창을 냈으며, 천장의 칠조룡(七爪龍) 조각은 황제를 상징한다. 황궁우 앞에는 1902년에 고종의 즉위 40년을 기념하기 위한 돌로 만든 북(石鼓)을 세웠는데, 이 북은 제천을 위한 악기를 상징하는 것으로서 몸체에는 화려하게 조각된 용(龍) 무늬가 있다.
소공동 87-1번지에 있던 환구단과 황궁우. 현재 이 자리에는 웨스틴조선호텔이 서 있다.
환구단과 황궁우는 당시 고종이 황제로서 제천 의례를 행하던 곳으로, 예로부터천자라고 주장해 온 중국이나 천황이라고 주장해 온 일본과 대등한 자격으로 서기 위해 황제국의 위용을 과시하는 한편 서구 열강에 대해 독립적인 국가상을 보여주고자 했던 정치적·역사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현재는 황궁우와 3개의 돌북, 그리고 석조대문만이 남아 있다.
한편, 1960년대 해체되어 없어진 것으로 알려진 환구단의 정문이 2007년 8월 강북구 우이동 옛 그린파크호텔 터에서 발견되어 복원 공사가 진행되어 2009년 12월에 복원 공사가 마무리되었다.
소공동에 위치한 웨스틴조선호텔은 1910년 이후 각 철도간선이 완공됨에 따라 외국인의 서울 통과가 많아지자 서양식 호텔의 필요성이 생겨 건설된 호텔로 1914년 9월 20일에 준공되어 같은 해 10월 10일 개관하였다. 인천의 대불호텔(1888), 정동의 손탁호텔(1902) 다음으로 한반도에서 세 번째로 세워진 서양식 호텔인 조선호텔은 처음에는 만철회사(滿鐵會社)가 건설했는데, 1920년대에 들어와서 철도국 직영이 되었다. 해방 후 조선호텔의 상황도 격변했다.

일제강점기 철도호텔(상)과 현재의 웨스턴조선호텔(하)
일제강점기 철도호텔(상)과 현재의 웨스턴조선호텔(하)

서울을 포함한 한반도 남부에 진주한 미군은 이 호텔에 군정청 사령부를 두었고, 귀국한 이승만 등의 집무실도 두었다. 1948년 대한민국정부 수립 후에는 수도 서울을 대표하는 호텔로 군림하였다. 1967년 6월 한국관광공사와미국항공사가 조선호텔 건설 계약을 체결한 후 신축하여 현재의 건물로 재개관하였다. 현재는 삼성그룹에서 독립한신세계가 지분 100퍼센트를 인수하여 운영하고 있다.
소공동 관할 지역의 특성으로는 업무용 시설, 백화점, 음식점, 호텔 등 상업시설 밀집지역이면서 교통이 편리하고 유동 인구가 많은 서울의 중심지역이라는 점을 꼽을 수 있다.
또한 조선시대를 비롯하여 대한제국기, 일제 강점기의 역사적 중심지로서 관련 문화재가 혼재하는 유구한 역사를 지닌 지역 특성을 지니고 있다. 또한 ‘최초의 아이스크림’, ‘최초의 엘리베이터’, ‘최초의 댄스파티’ 등 한국 서구 문화의 근원일 뿐 아니라 수많은 ‘한국 최초’의 신화를 남기며 한국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서 자리매김해 왔다.

1902년 발행된 '서울지도'의 북창동 부근과 북창동 관할구역의 경계
1902년 발행된 '서울지도'의 북창동 부근과 북창동 관할구역의 경계

◆북창동(北倉洞)
남대문로 북쪽, 세종대로와 소공로 사이에 위치하는 북창동(北倉洞)은 조선시대 초기 한성부 남부 호현방(好賢坊)과 서부 양생방(養生坊) 일부에 속했던 곳으로 일제 강점기에 북미창정(北米倉町)이라 불리다가 1946년 10월 1일 일제식 동명을 우리말로 바꾸면서 북창동이 되었다. 북창동의 동명은 이곳이 조선시대 선혜청(宣惠廳)의 창고가 있던 북쪽이라고 해서 유래되었다.
선혜청은 1608년(광해군 1)에 상평창(常平倉)을 개칭하여 대동법의 실시에 따라 대동미(大同米)ㆍ포(布)ㆍ전(錢)의 출납을 맡아보던 기관으로 1753년(영조 29)에 균역청을 병합하였다가 1894년(고종 31)에 폐지되었다.  
북창동은 영조 때 한성부 남부 호현방 송현계·소공동계와 서부 양생방 태평관계·창동계·송현계 지역이었으며, 그 뒤 1894년 갑오개혁 뒤 전국의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남서(南署) 회현방 소공동계 소공동·사축동, 양동계 전교동, 예빈동계 예빈동, 송현계 송현동과 서서(西署) 양생방 창동계 창동, 상동계 상동, 태평동계 태평동·양동 전교로 나뉘어졌다.
1910년 조선총독부령 제7호로 한성부에서 경성부로 바뀌면서 경기도 관할이 되었으며 1914년 경기도고시 제7호로 사축동·공대동과 양동ㆍ송현동ㆍ태평동 일부를합하여 북미창정이라 하였으며, 1943년 부령 제163호에 의한 구제도 실시에 따라중구 북미창정이 되었다. 1946년 일제식 동명을 우리말로 고칠 때 중구 북창동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북창동은 동으로는 소공동, 남으로는 남대문로3가, 서로는 태평로2가, 북은 소공동과 접해 있다. 조선시대 북창동의 자연부락 명칭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빈텃골은 예빈시(禮賓寺)가 이 마을에 있다가 남별궁으로 옮겨가 터가 비었다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으로 일명 공도동(空塗洞)이라고도 불렸다. 예빈시는 고려 초부터 있던 관청으로 주로 빈객의 접대 및 종실 대신의 공궤(供饋) 등을 맡아 하였는데 조선초기에는 세종로 부근에 있다가 뒤에 북창동으로 옮겨졌다.
한편 예빈시 앞에는 큰 못이 있고 그 속에는 많은 물고기가 살았다고 한다. 예빈시에 근무하던 관원들이 묵은 쌀로 연못의 고기를 길렀는데 이 소문을 들은 태종은 쌀이 묵고 썩었다고 하여도 소채보다는 나을 것이며, 암만 사람들이 굶주려도 모두 구제하지 못하는데 어찌 쌀로 고기를 기를 수 있느냐며, 다시는 그런 일이 없게 하라 하여 그 뒤로는 고기를 기르지 못하였다고 한다.

허목 초상 (보물 제1509)
허목 초상 (보물 제1509)

사축섯골은 짐승 치는 일을 맡은 사축서(司畜署)가 있던 마을이라고 하여 이름이 붙여졌는데 일명 사축동(司畜洞) 또는 축동(畜洞)이라고도 하였다. 사축서는 태조 원년(1392)에 설치하여 처음엔 전구서(典廐署)라고 하다가 그 뒤 사축서라고 개칭했으며, 인조 15년(1637)에 일시 폐지했다가 복구하였는데 영조 43년(1767)에 이를 혁파하고 호조에 이관하였다.
한편 예전에는 북창동과 남창동에 걸친 지역을 창동(倉洞)이라 했는데 조선 후기에 우의정을 지낸 미수(眉?) 허목(許穆,1595~1682)이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기도 하다.

과거 북창동 음식문화축제 행사 모습
과거 북창동 음식문화축제 행사 모습

또한 북창동과 소공동의 경계지점에는 송현(松峴)이라 불리던 곳이 있었는데 조선 후기의 문신 심상규(沈象奎, 1766~1838)가 살았다. 소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는 고개라는 뜻과 소나무처럼 재주가 뛰어나고 곧은 청송(靑松) 심씨(沈氏)가살았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오늘날 북창동 지역은 롯데호텔을 중심으로 하는 고급 숙박시설들과 각종 음식 및 서비스, 위락 등을 제공하는 업체들이 자리 잡고 있다. 이곳은 주변 빌딩가에서 근무하는 사람들과 국내 미식가들이 자주 찾을 뿐만 아니라 한국 전통 음식점들이 밀집되어 있는 곳으로 ‘한국의 맛’을 찾는 외국인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명동, 남대문시장 등과 함께 2000년 3월 관광특구로 지정되었으며 매년 봄과 가을 음식문화축제를 개최하고 있다.

 

-박스기사-

1910년대 명동. 일제 강점기 명동은 일본인들에 의해 번화한 상업지구로 변신했다.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1910년대 명동. 일제 강점기 명동은 일본인들에 의해 번화한 상업지구로 변신했다.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중구의 위치 및 환경
중구는 수도 서울의 심장부로서 경제, 문화, 언론 및 유통의 중추기능이 집중되어있고 퇴계로, 을지로, 청계천로, 남대문로, 왕십리길 등의 간선도로가 관통하면서 지하철 1~6호선이 통과하는 교통의 요충지로 주ㆍ야간 활동인구가 가장 많은 핵심 지역 중 하나이다. 620년 역사도시답게 재래식 가옥과 현대식 고층 빌딩이 혼재하는 독특한 매력이 있으나 도시의 기반시설이  노후되어 도심 재개발사업 등 지속적인 정비사업이 추진되는 지역이다. 신당동 및 중림동 일대는 주택 재개발사업이 완료되면서 아파트지구가 형성되었다.
또한 남대문·중부·평화시장 등의 대형 전통시장과 롯데·신세계 등의 대형 백화점, 명동과 충무로의 현대식 쇼핑가, 그리고 대형 쇼핑몰인 두산타워·밀리오레, 동대문디자인플라자 등 신구 유통시장이 복합적으로 형성되어 서울의 대표적인 상업지역으로 발전하였다.
소공동과 북창동 등 중구의 핵심지대는 대기업, 은행 본점 등의 중추관리기능이 밀집됨으로써 중심업무지구의 특성을 보이며, 핵심 지역의 외곽에는 보험 및 증권회사 등 전문 서비스 지구가 형성되어 있다. 도서출판과 보도 기능을 하는 업종도 입지하고 있다. 이처럼 중구에는 중심지대에 중추관리기능이, 간선도로변에도심성 소매 활동이, 간선도로 후면에는 서비스 활동이, 을지로와 청계천에는 기계, 기구, 부속품 등의 판매지역이 서로 연계하여 분포되어 있다.
한편 명동, 남산, 남대문시장, 동대문패션타운 등 관광 명소가 많아 서울을 방문하는 관광객이 즐겨 찾는 우리나라 대표 관광지로 자리매김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관광호텔을 비롯한 숙박시설도 성업 중이다.

▲중구의 행정동과 법정동
중구의 행정은 현재 15개의 행정동이 나누어 관할하고 있다. 행정동(行政洞)이란 주민들의 거주 지역을 행정상의 편의를 위하여 설정한 행정 구역 단위로서 주로 인구가 많은 하나의 법정동에 여러 행정동을 설정하여 동 행정을 맡게 하거나, 인구가 적은 여러 법정동을 묶어 하나의 행정동을 두기도 한다. 이에 대비되는 법정동(法定洞)은 법률로 지정된 행정 구역으로서, 그 명칭은 전통적인 마을 이름에서 유래한 것으로 대부분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 시 정해진 대로 현재에 이르고 있다.
광복 직후의 과도기와 6ㆍ25전쟁으로 인한 혼란이 어느 정도 진정된 1955년 4월18일 서울특별시조례 제66호에 의해 행정동제가 실시되었다. 중구의 65개 법정동은32개 행정동이 관할하게 되었다. 이때의 32개 행정동은 덕수동, 흥천동, 청계동, 대창동, 숭남동, 도동, 동자동, 회현1가제1동, 회현1가제2동, 훈련동, 을지로6ㆍ7가동, 훈도동, 산림동, 회현2ㆍ3가동, 남산동, 남곡동, 동원동, 충무로1ㆍ2가동, 명동, 충인동, 야현동, 영희동, 인현1가동, 낙선동, 장충1가동, 장충2가동, 쌍림동, 광희1가동, 광희2가동, 을지로2ㆍ3가동, 을지로4가동, 주교동이었다.

▲중구의 경계
중구는 서울의 25개 구 가운데 가장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청계천을 경계로 옛 서울 분지의 반을 차지하고 있다. 중구의 위치를 살펴보면 북쪽으로는 청계천을 경계로 종로구와 접하고, 남쪽으로는 남산의 정상과 응봉의 분수령을 따라 용산구와 이어져 있다. 동쪽으로는 신설동로터리에서 매봉산과 응봉을 잇는 난계로를 경계로 성동구와 이웃하고 있으며, 서쪽으로는 만리동, 중림동과 서대문로터리를 경계로 서대문구와 접하고 있다. 중구의 동단점의 위치는 신당동 679번지이고, 서단점의 위치는 만리동2가 200-4번지, 남단점의 위치는 신당동 산 54번지이며, 북단점의 위치는 황학동 2472-1번지이다.
조선시대에 중구 지역은 서울의 변두리에 지나지 않았다. 종로구와 함께 4대문 안의 도심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청계천의 남쪽에 있다 하여 남촌으로 불리기도 했고, 벼슬이 높지 않던 양반들 특히 군인계층이 많이 살고 있어서 ‘아래대’로 불렸으며 오늘날 종로구 지역에 살았던 북촌의 우대사람들에게 홀대를 받았다고 한다.
예로부터 햇빛이 잘 드는 남향집을 선호했던 사람들에게 남산의 북쪽 기슭은 집터로는 호응을 얻지 못하였다. 이 때문에 계급이 높은 양반들은 북악 아래 북촌에 모여 살고 남산이 앞을 가리는 현 중구 일대의 남촌에는 낮은 계급의 양반이나, 가난한 양반 혹은 중인들의 집단 거주지가 되었다.
청일전쟁을 고비로 청나라의 중국세력과 그 뒤를 이어 들어온 일본 제국주의세력은 이미 시가(市街)가 꽉 짜인 종로보다 중구로 눈을 돌려 이 지역을 차지하고 개발하기에 이르렀다. 그에 따라 소공동에는 화교촌이 생겨났으며, 남대문 주변과 명동과 충무로 일대에는 일본인 상가가 터를 잡았고 지금의 신세계백화점 자리에는 삼월백화점(미쓰코시백화점)이, 지금은 사라진 미도파백화점에는 정자옥백화점(丁字屋百貨店)이 자리 잡기도 하였다.
내무부 청사로 사용하다 헐어내고 대신 그 자리에 선 현재의 외환은행 본점 자리에는 일제의 식민지 약탈기관이었던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있었고, 지금의 한국은행은 조선은행이었는데 일본인과 한국인이 앞을 다투어 이 일대에 저마다 은행을 건축해 들어섬으로서 한국의 ‘돈고랑‘이 종로에서 중구로 옮겨졌다. 1943년 구제 실시로 중구라는 명칭이 생겨난 것도 서울 중심부로서의 위상이 커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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