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기획- 서울의 중심 중구의 역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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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터넷편집부
  • 승인 2019.10.23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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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구 동네방네 이야기 시리즈

본지는 올해 창간 26주년을 기념하여 세계적인 도시로 발돋움하고 있는 서울시의 역사를 총 네 차례에 걸쳐 재조명해보았다. 서울 역사 고증 활동에 탄력을 받은 본지는 이번에 더 세부적으로 들어가 서울의 중심도시로 자리매김한 중구의 역사를 동별로 묶어 소개해보기로 했다.

 

태평로2가의 관할구역 경계, 태평로의 명칭은 조선 초기 중국 사신들이 유숙하던 태평관에서 유래됐다
태평로2가의 관할구역 경계, 태평로의 명칭은 조선 초기 중국 사신들이 유숙하던 태평관에서 유래됐다

03. 태평로2(太平路二街)

서울시청과 숭례문 사이의 세종대로(구태평로) 양쪽에 위치한 태평로2(太平路二街)는 조선시대 초기 한성부 서부 황화방(荒貨房), 양생방(養生坊), 반석방(盤石坊) 각일부와 남부 호현방(好賢坊) 일부에 속했던 곳으로 일제 강점기에 태평통2정목(太平通二丁目)으로 불리다가 1946101일 일제식 동명의 우리말 개정 원칙에 따라 태평로2가로 바뀌었다. 조선시대에 태평관(太平館)이 숭례문 근처에 있었던 데서 태평로라는 이름이 유래하였다.

조선시대 초기에 설치된 태평관은 중국 사신을 접대하고 그들이 유숙(留宿)하던 곳으로 현재대한상공회의 소건물 북쪽인근에 그 터가 남아있다. 이동의 남북을 관통하고 있는 세종대로(구 태평로)는 조선 후기까지도 없었던 길이다.

이 길은 1902년에 제작된 서울 지도에도 없었는데 1912년 경성시구개수예정계획에 따라 폭 27m로 정하여 시공하여 1914년에 개통되었다. 1936년에 노폭 34m, 길이 800m로 하여 황토현광장(현 광화문 주변)~남대문 구간으로 정해졌다. 1952325(내무부고시 제23) 노폭이50m로 확장되어 지금에 이른다.

태평로2가는 남북으로 한가운데를 세종대로(구 태평로)가 길게 지나 동 면적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으며, 그나마 거주 지역은 남대문구역으로 묶어 재개발됨으로써 옛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다. 북창동에 면한 지역도 북창지구 재개발로 현대식 고층 건물들로 채워져 있다.

이러한 옛 태평로 변 서소문동 58-12번지 옛 선혜청 별창자리에는 원동에서 옮겨온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건물인 전도국(典圖局)과 예빈시(禮賓寺), 전도감(錢都監)을 비롯하여 도성의 첫 번째 출입문인 남대문이 있어서 조선시대의 태평로2가는 매우 활기찬 곳이었다.

태평로2가의 옛 모습을 추측해 볼 수 있는 자연부락 명칭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관우물골은 태평로2가와 서소문동에 걸쳐 있던 마을로 관우물이 있었으므로 붙여진 이름인데 한자로는 관정동(館井洞)이라 하였고 들우물골은 소공동, 태평로2가 및을지로1가에 걸쳐 있던 마을로 돌 틈에서 물이 솟아오르는 우물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석정동(石井洞)이라고도 하였다.

통일로(옛 의주로) 중 의주로 1가 구역
통일로(옛 의주로) 중 의주로 1가 구역

대정동(大貞洞)은 현재 정동과 태평로2가에 걸쳐 있던 마을로 덕수궁 남쪽 담을 경계로서소문에이르는북동쪽인데큰정동이라고도하였다. 복초다릿골은 현서울시청 서남쪽에 복초다리[伏車橋]가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복차교동(伏車橋洞)이라 고도하였다.

상정승골은 남대문로3, 태평로2, 북창동과 남창동에 걸쳐 있던 마을로 인종때 정승 상진(尙震, 1493~1564)이 살았으므로 붙여진 이름으로 상동(尙洞)이라고도 하였다. 생사당골은 서소문동, 태평로2, 남대문로4가에 걸쳐 있던 마을인데 생복당(生福堂)인선무사(宣武詞)가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칠간동(七間洞)은 남대문 서북쪽에 있던 마을로 골목이 일곱 개가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서울 지명을 숫자순으로 부를 때 일감정, 이뭇골, 삼청동, 사직골, 오궁터, 육조앞, 칠간안, 팔관동, 구리개, 십자각이라하였는데칠간동은일명칠간거동이라고 하였다. 태평동은 서소문동, 태평로2, 북창동, 남대문로4가에 걸쳐 있던 마을로 명나라사신을 접대하던 태평관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고, 편잣골은 태평로2가에서 북창동으로 들어가는 입구 부근에 있던 마을로 편자전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편자동(片子洞)이라고도 하였다.

현 태평로257번지 서쪽에 전교(錢橋)라는 다리가 있었다. 이 다리는 전도감교(錢都監橋)라고도 불렀는데 전도감 앞이 되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영조 27(1751)에 편찬된 도성삼군문분계총록에는 태평로2가에 전도감의 자리를 표시하고 다리의 위치와 이름을 기록해 놓았는데, 1864년 제작된 대동지지(大東地志)에 지금의 신당동 140번지와 261번지 부근에 교량을 표시하여 전도감교라 하였는바, 이로 보아 전도감이 광희문 밖으로 이전해갔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빈객(賓客)의 연향(宴享), 종재(宗宰)의 공궤(供饋) 등의 일을 맡았던 예빈시가 한때태평로2가에 있었다.

예빈시는 태조원년(1392)에 설치하였으며 태종3(1403)에는 의순고(義順庫)를 병합하였다가 고종 31(1894)에 폐지하였는데 처음에는 의정부 앞에 두었다가 이곳으로 옮겼고 그 뒤 남별관으로 옮겼다. 태평로2165번지에는 이문(里門)이 있었다. 이문은 세조 12(1466) 1월에 설치하였으며 금도(禁盜), 포도(捕盜), 금화(禁火) 등 치안에 그 목적이 있었다. 이문은 보통 마을 앞 입구에 설치하고 교대로 숙직케 하였는데, 10호 이하의 마을은 2명이, 20호 이하는 3, 30호 이하는 4, 30호 이상의 마을은 5~6명이 차출되어 교대로 숙직하였다. 이문의 수리 및 중건 등 관리와 운영은 전부 동민이 부담하였는데, 당시 한성부민에 의한 말단치안기구였으며 임진왜란 후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04. 의주로1(義州路一街)

이화여자외국어고등학교 서쪽, 통일로(구 의주로)변에 위치한 의주로1(義州路一街)는 조선시대 초기 한성부 서부 반석방(盤石坊)과 반송방(盤松坊)에 속했던 곳으로 일제 강점기에 의주통1정목(義州通一丁目)이라 불리다가 1946101일 일제식동명을 우리말로 바꾸면서 서대문구 의주로1가로 되었다. 1975101(대통령령 제7816) 관할구역이 변경되어 중구 의주로1가가 되었다.

의주로1가의 동명은 의주(義州)로 가는 길목이라는 뜻에서 온 것이다. 현재 통일로와 서소문로가 교차되는 지점에는 도성 8문 중 하나인 서소문(西小門)이 있었다. 이문은 서소문동 큰길에 위치하였던 문으로 일반적인 통행로였고, 광희문과 함께 시신(屍身)을 성 밖으로 운반하던 통로 구실을 하였다.

태조 5(1396) 9월에 다른 성문과 함께 지어졌을 때는 소덕문(昭德門)이라고도 하였다. 이 부근은 지대가 낮아서 태조 때 토성을 쌓았던 곳이며, 1422(세종 4)에 이것을 석성(石城)으로 개축한 것으로 미루어 소덕문으로 고쳐서 지었으리라 믿어지나 확실한 기록이 없다.

조선 순조이후에는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심해지면서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서소문 밖에서 처형되기도 하였다. 이 문은 1908년 철거되었고 주변 성벽도 1914년에 도시계획이라는 명목으로 헐리게 되었다.

의주로1가와 충정로1가에 걸쳐서는 조선시대에 고마동(雇馬洞)이라는 마을이 있었는데, 역마(驛馬)를 빌려주던 고마청(雇馬廳)이라는 관아가 있어서 그 이름이 유래되었다.

이동의 명칭이 된 의주로(현통일로)는 조선시대 사신들이 의주를 거쳐 중국으로 가던 주요통행로였으므로 역마를 담당하는 고마청의 역할이 긴요하였다. 이 지역은 순청(巡廳)이 있어서 순라꾼들이 많이 모여 살았고, 서울에서도 살기 좋은 곳으로 유명하였다. 한경지략(漢京識略)에 의하면 무학대사가 이 일대를 복택(福宅)이라 한이래, 조선의 내로라하는 사대부들은 자손이 길이 번성할 수 있는 길지(吉地)라 하여 이곳을 택지로 정하여 살았다.

조선 세종 때 6진 개척으로 유명한 김종서 등이 이 일대에서 살았다. 의주로1가의 현 위치는동쪽은 순화동과 접해 있고, 서쪽은 서대문구, 남쪽은 의주로2, 북쪽은 충정로1가와 이웃하고 있다. 의주로1가에 남아 있는 조선시대 자연마을의 명칭은 다음과 같다.

경못다리는 충정로1가와 의주로1가에 걸쳐 있었는데 경교다리가 있었으므로 붙여진 이름으로 경교라고도 하였다. 미나릿골은 미근동, 합동, 의주로1, 충정로2~3가에 걸쳐있던 마을로 한자로는근동(芹洞)이라고도 하였다. 초리우물골은 미근동, 충정로2, 의주로1~2가에 걸쳐 있었는데 초리우물이 있었 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한자로는 미정동(尾井洞)에서 미동(尾洞)으로, 다시 미동(渼洞)으로 바뀌었다. 사거리는 의주로1~2가에 걸쳐 있었는데 네 갈래 길로 나뉘어 있었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며, 새다릿골은 신교(新橋)라고도 하였다. 새말은 싸전[米廛]아래새로생긴마을이라고하여붙여진이름이다. 신동(新洞)이라고도 하였다.

장골은장전(醬廛)이 있다고 하여 유래 되었는데 서장동(西醬洞)이라고도 했으며, 수렛골은 서소문서북쪽마을로 차동(車洞)이라고도 불렀는데 영조37(1761)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 민씨의 탄생지에비를 세우고 난 뒤부터추모동이라고도 불렀다. 양태전골은 갓양태전이 있어 유래되었으며 양대동(涼臺洞)이라고도 하였다. 조선시대 의주로 1가 일대는 싸전으로 유명하였다.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에 의하면 싸전은 여러 가지 곡식을 파는데 모두 다섯 곳이 있다. “하 싸전이 있는데상전(上廛)은 의금부 서쪽에 있고 하전(下廛)이 이현시장(梨峴市場)에 있는데 이들은 국역삼분(國役三分)에 응하며 도성문밖의 싸전은 소의문(昭義門) 밖에있어서국역이 분에 응하였으며 서강 싸전과 마포 싸전은 모두 분수가 없다라는 내용이 보인다.

이 기록을 보아소의문(‘서소문’) 밖에는 서울의 5대 미전 가운데 하나가 자리잡고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싸전의 윗부분(문 안쪽)이 미전상계가 되었을 것이고 아래쪽이 미전하계일 것이다. 미나리꽝으로 부르던 지역은 미근동 서울경찰청 일대와 농협중앙회 본부 건물에서 이화여고 뒷담을 연결하던 천변에 넓게 분포되어 있었는데 개천이 복개되고 의주로가 확장됨에 따라 흔적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이곳에서 나오던 미나리는 연하고 깨끗해서 궁중에도 진상되었던 최상품으로 대한제국 때까지 유명하였으며, 사신들의 행차가 평원처럼 넓게 전개되었던 미나리 밭 한가운데를 달려 의주까지 가는 풍광을 노래한시()가 여러편 전한다.

 

05. 충정로1(忠正路一街)

서대문역교차로와 정동사거리 사이의 새문안로 남동쪽에 위치한 충정로1(忠正路一街)는 조선시대 초기 한성부 서부 반송방(盤松坊)에 속했던 곳으로 일제 강점기 죽첨정1정목(竹添町一丁目)이라 불리다가 1946101일 일제식 동명을 우리말로 바꾸면서 서대문구 충정로1가가 되었다. 이후 1975101(대통령령 제7516) 관할구역이 변경되어 중구 충정로1가로 되었다. 충정로1가의 동명은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된 데 항의하여 순국 자결한 충정공(忠正公) 민영환(閔泳煥, 1861~1905)의 시호인 충정에서 유래되었다.

민영환은 1878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며, 이후 세도를 구가하던 민씨 척족의 총아로서 1881년 동부승지, 1882년 성균관 대사성에 오르는 등승진을 거듭하며 요직을 거쳤다.

충정로1가의 관할 구역 경계. 충정로1가의 동명은 충정공 민영환의 시호를 딴 것이다
충정로1가의 관할 구역 경계. 충정로1가의 동명은 충정공 민영환의 시호를 딴 것이다

임오군란 때 생부민겸호가 살해되자 사직하였다가 1886년 이조참의로 제수되면서 정계로 복귀하였고, 이후 도승지, 이조참판, 예조판서, 형조판서, 한성부윤, 독판내무부사등의관직을 지냈다.

1896년 특명전권공사로 러시아 제국의 황제 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 참석했는데, 이때 일본, 미국, 영국 등지를 거치면서 서구 문명을 처음 접한다. 귀국 후 의정부찬정, 군부대신을 지낸 다음, 1897(광무 1) 또다시 영국독일프랑스러시아이탈리아오스트리아-헝가리 6개국에 대한 특명전권공사로 발령을 받고 외유하였다.

이를 계기로 서양 문물에 눈을 뜬 민영환은 유럽 열강의 제도를 모방하여 정치제도를 개혁하고 민권 신장을 꾀하고자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 받았다.

충정로1가는 동쪽이 정동과 접해 있고, 서쪽은 충정로3가와 연해 있으며, 남쪽은 충정로3가 및 합동과 이웃하고, 북쪽은 충정로2가 및 냉천동과 경계를 마주보고 있다. 조선시대 충정로1가의 흔적을 남기고 있는 자연마을 이름으로는 경굣다리와 고마청골 등이 있다. 경굣다리는 충정로1가와 의주로1가에 걸쳐 있던 마을로 경교다리가 있었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이 경교다리는 충정로190번지 동남쪽에 있었는데 경기감영 창고의 앞쪽이 되므로 경굣다리 또는 경고교(京庫橋), 경구교(京口橋) 등으로 불렀으며 이를 줄여 경교라고 하였다.

새문밖은 돈의문을 새로 세워 새문이라고도 하였는데 새문의 바깥이 되어 새문밖, 한자명으로 신문외(新聞外)라고 한 데서 유래되었다. 충정로190번지 일대는 옛날 돈의문밖에 해당되며 이곳에 세운 경기 감영은 태조2(1393)에 건립하였다. 지금의경기도청에 해당한다. 조선시대 외관(外官)의 하나로서 경기감사, 또는 경기관찰사가 있던 관아였다.

관찰사는 예하의 부윤(府尹), 목사(牧使), 대도호부사(大都護府使), 도 호부사(都護府使), 군수(郡守), 현령(縣令), 현감(縣監) 등 지방관을 감독하는 한편 감영(監營)에는 이방, 호방, 예방, 병방, 형방, 공방 등 6방이 있고 도사(都事), 판관(判官), 막비(幕費) 등의 기관을 두어서 일반 행정과 군정, 사법, 경찰 등의 정사를 보았다. 경기감영은 속칭 포정사(布政司)라고도 하였는데, 1896년에 수원으로 옮겼고, 그 후 감영의 건물은 군영(軍營)으로 되었다가 광무 7(1903)에 한성부가 이전해 와 사용되었다.

고마청골은 충정로1가와 의주로1가에 걸쳐있던 마을로 고마청이 있었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고마청은 조선 숙종 때 고마법(雇馬法)의 시행으로 사신이나 지방관의교체에 따른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설치되었다.

고가청(雇價廳)이나 고마고(雇馬庫)등으로도 불렸다. 한경지략에 의하면 고마청 근처에 김종서(金宗瑞, 1390~1453)의 집이있었다고 한다. 김종서는 문과에 급제한 후 세종 때 함길도 도관찰사(咸吉道都觀察使)가 되어 변경에서 외적의 침입을 격퇴하고 6(六鎭)을 설치하여 두만강을 국경선으로 확정한 공을 세운 인물이다.

한편, 현재 충정로1가에는 농업박물관, 쌀박물관 등이 위치하고 있다. 농협중앙회가 세운 농업박물관과 쌀박물관은 이 지역의 빼놓을 수 없는 문화시설 중 하나이다. 농업박물관은 우리나라 최대의 농업 전문 박물관으로 198711월 건립되었다. 이박물관은 지상 2, 지하 1층 구조이다. 평일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까지 개장하며, 입장료는 무료다. 연면적은 약 3,461이고, 5,000여종의 유물을 소장 중이며 그중2,000여점을 전시하고 있다.

충정로1가를 통과하는 주요 도로로 충정로(忠正路)가 있다. 서대문구 충정로삼거리에서 서대문역을 잇는 0.8km의 왕복8차선으로 동의 북서쪽 사면을 지난다. 이 도로는 서쪽은 서대문구, 동쪽은 중구로 나누는 기준선이며, 국도 제6호선이 이 도로와함께 지나가고 있다.

이 도로는 서대문역 교차로를 출발하여 충정로1~3가를 지나고 충정로사거리에서 신촌로에 이어지는 광화문에서 신촌방향을 잇는 간선도로이다.

 

06. 서소문동(西小門洞)

지하철 2호선 시청역 동쪽 출구에서 서소문 고가 차도 입구까지의 서소문로 남북방향에 위치한 서소문동(西小門洞)은 조선시대 초기 한성부서부 황화방(荒貨房)의 일부에 속했던 곳으로 일제강점기에 서소문정(西小門町)이라 불리다가 1946101일 일제식 동명을 우리말로 바꾸면서 서대문구 서소문동이 되었다. 1975101(대통령령 제7816) 관할구역이 변경되어 중구 서소문동이 되었다. 서소문동의 동명은 이곳에 도성8문의 하나인 서소문이 있어서 그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이곳 동명의 유래가 된 서소문의 원래 이름은 소덕문(昭德門)으로 서울성곽의 숭례문과 돈의문의 중간지점에 있었다. 이 문은 1396년에 다른 성문과 함께 건축되었으며 1472년에 소의문(昭義門)으로 개칭되었다.

일제 강점기인 1914년 일제가 시행한 도시계획에 따라 주변의 성곽과 함께 철거되었다. 사진을 통해 확인되는 바로소덕문은 성보다 약간 높게 돌을 쌓은 뒤 가운데 홍예문(虹霓門) 하나를 만들어 통로를 냈고, 그 위에는 정면 3칸 측면 2칸 구조의 문루가 있었다. 1985년에 설치한 소덕문터표지석이 중앙일보사와 대한통운 건물사이의 철탑 주차장 안에 있다.

조선후기 고마청의 위치와 의주로1가의 관할구역 경계
조선후기 고마청의 위치와 의주로1가의 관할구역 경계

서소문동의 현 위치는 동쪽은 태평로2가와 접해 있고 서쪽은 순화동과 연해 있다. 남쪽은 남대문로4가와 북쪽은 정동과 이웃하고 있다. 오늘날의 서소문동은 도심한가운데 위치하여 업무지역으로 각광 받고 있으며, 서울에서도 금싸라기 땅으로 주목받는 곳이다.

동 면적의 대부분이 도심재개발로 인해 지번이 병합되어 조선시대의 흔적을 찾기가 매우어렵지만 문헌상 남아있는 지명으로 몇 군데를 확인해볼 수 있다. 안우물골은 학다리골 동쪽에 있었으며 안 우물[內泉]이 있어서 명칭이 유래되었고 내천동으로도 불렸다. 관우물골은 서소문동과 태평로2가에 걸쳐 있던 마을로 관우물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일명 관정동이라고도 하였는데 태평관에 속했던 우물로 추정된다.

이 외에도 학다리골, 새창골, 생사당골, 왜솔모루 등의 자연마을이 있었다. 학다리골은 학 다리가 있었다는 데서 유래하였으며 학교동 또는 줄여서 학동이라고도 하였다. 새창골은 선혜청의 새 창고가 있었다는 데서 붙여진 이름인데 순조 34(1834)에 제작된 수선전도(首善全圖)에 이 마을 이름이 보인다. 생사당골은 명나라 장수들을 위한 사당인 선무사(宣武祠)가 있었다는 데서 명칭이 유래되었다. 서소문동, 태평로2, 남대문로4가에 걸쳐 있었다. 왜솔모루는 서소문동 북쪽에 있던 마을이다.

임진왜란 때 왜병들이 성을 쌓고 머물러 왜성목왜성항이라 하던 것이 변하여 왜성모루왜솔모루왜성동왜송동이 되었다. 한편 선무사 터는 조선시대 선무사가 있던 곳으로, 지금의 서소문로 106 일대에 해당한다.

1598년에 세워진 선무사는 임진왜란 때 원군(援軍)으로 출병한 명나라 장수 형개(荊芥)와 양호(楊鎬)를 배향했던 사당이다. 선무사가 세워진 것은 1598(선조 31)이었다. 처음에는 형개의 위패만을 봉안했으나, 같은 해 8월에 양호거사비(楊鎬去思碑)를 함께 세웠다.

이어 1604(선조 37)에 양호의 위패를 선무사에 추가로 배향하고 매년 음력 3월과 9월 두 번째 정일(丁日)에 제사를 지냈다. 선무사는 형개와 양호라는 살아 있는 사람을 모셨기 때문에 생사당(生祠堂)으로도 불렸다. 명나라 사람과 이순신(李舜臣) 장군의 자손을 임명해 사당을 관리하도록 했다. 선무사 건물은 일제강점기에 모두 철거됐고, 1970년대 초 주차장건설로 사라지고 말았다.

서소문동과 그 주변 일대는 조선시대 이황(李滉, 1501~1570)을 비롯하여 김장생(金長生, 1548~1631), 김집(金集), 박돈(朴惇), 이산해(李山海) 등 많은 명인들이 살았던 곳이기도 하다. 이황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로 조선 성리학의 기초를 닦아 퇴계학파를 형성한 인물이다. 이황 집터는 젊은 시절 서울에서 관직생활을 할 때그가 살던 집이 있던 곳이다. 지금의 중구 덕수궁길 15에 해당한다. 그는 생의 대부분을 고향인 안동에서 제자들을 양성하며 보냈지만 젊은 시절에는 과거에 급제해 중앙 관직을 역임하기도 했는데, 그때 살던 집이 바로 서소문동에 있었다. 덕수궁 돌담길에서 서울시립미술관으로 올라가다보면 화단 안에 표지석이 설치되어있다. 김장생은 조선중기 의학자이자 문신으로, 중구정동(貞洞) 부근에서출생하였으며, 자는 희원(希元), 호는 사계(沙溪), 본관은 광산(光山)이다.

김장생은 관직보다는 학문에 힘을 쏟아 조선시대 예학(禮學)의 체계를 잡는데 크게 기여하였고, 기호학파를 이룩하여 많은 후학을 양성하였다. 그의 문하로는 아들 김집을 비롯하여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 이유태(李惟泰) 등이 있었고, 서인을 중심으로 한 기호학파를 이룩하여 조선 유학계에 있어서 영남학파와 쌍벽을 이루었다. 중구 덕수궁길 서울시립미술관으로 올라가는 길에 김장생, 김집선생생가터표지석이있다.

현재 덕수궁돌담길 남쪽인 서소문동 37번지 일대는 1897년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부터 덕수궁으로 이어(移御, 임금이 거처하는 곳을 옮김)한 후에 의정부를 설치했던 곳으로 이곳에는 대법원과 법원행정처가 있었다. 그리고 38번지 일대에는 대검찰청, 서울지방고등검찰청, 서울지방검찰청 서부지청 등이 있었다. 지금은 이 일대에 서울시립미술관과 서울시청서소문청사 등이 위치하고 있다.

서울시립미술관은 1988819일 종로구 신문로 경희궁지 내 서울고등학교 건물을 보수하여 개관했다가 2005517일 옛 대법원 자리인 지금의 자리로 이전하여 재개관했다.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은 르네상스식 건물인 옛 대법원 건물의 전면부와 현대식 건물의 후면부가 조화를 이룬 건물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재판소인 평리원(한성재판소)이 있던 자리에 1928년 일제가 경성재판소를 지었는데 이 건물은 광복 후 대법원으로 사용되었으며, 1995년 서초동으로 옮겨갔다.

옛 건물의 아치형 현관(20063월등록문화재제237) 일부만 남기고 지하2, 지상3층으로 신축되어 재탄생한 미술관은 서울 도심 한복판인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정동길에 위치하여 정동지역문화의거리 형성에 중심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자료제공: 중구문화원]

태평로2가에서 바라본 숭례문 주변 도로
태평로2가에서 바라본 숭례문 주변 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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