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의 독립운동가 ‘매헌 윤봉길 의사’
12월의 독립운동가 ‘매헌 윤봉길 의사’
  • 인터넷편집부
  • 승인 2019.11.25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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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100만 대군도 하지 못한 거사 치른 韓영웅

 

매헌(梅軒) 윤봉길(尹奉吉) 의사.
매헌(梅軒) 윤봉길(尹奉吉) 의사.

 

국가보훈처(처장 박삼득)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매헌(梅軒) 윤봉길(尹奉吉) 의사를 ‘191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윤봉길 의사는 충남 예산에서 아버지 윤황(尹璜)과 어머니 김원상(金元祥) 사이에서 1908년에 태어났다. 본관은 파평(坡平)이고 호는 매헌(梅軒)이다. 그가 10세 되던 해인 1918년 덕산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다음 해에 3·1운동이 일어나자 민족정신의 영향으로 식민지 교육을 거부하고 자퇴했다. 동생인 윤성의(尹聖儀)와 함께 한학을 공부했고, 1921년부터는 오치서숙(烏峙書塾)에서 사서삼경 등 한문학을 계속했다. 한문학 공부를 마치고, 1926년부터는 농민계몽·독서회운동 등 농촌사회운동을 펴나갔다.

농민계몽을 위해 농민독본(農民讀本)’이란 교재를 집필하여 야학회를 조직,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농촌의 불우한 청소년을 가르쳤다. 농촌의 발전을 위해 부흥원(復興院)'이란 단체를 설립하여(1929), 농촌 부흥운동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그해 218일 부흥원 주관으로 학예회를 열고, 촌극인 토끼와 여우를 성공리에 공연했는데, 이것이 원인이 되어 일본 경찰의 주목을 받게 됐다. 그러나 그 후에도 농촌활동을 계속했고, ‘월진회(月進會)’라는 농민단체를 만들어 회장에 추대됐고, 이를 기반으로 농촌자활운동을 펴나갔다.

그는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쳐 무엇인가 큰일을 해야겠다는 신념으로, ‘장부(丈夫)가 집을 나가 살아 돌아오지 않겠다는 내용의 편지를 남기고 193036일 만주로 떠났다. 이 정보를 입수한 일본 경찰이 미행해, 평안도 선천(宣川)에서 체포돼 45일간의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만주로 망명했고, 만주에서 같은 길을 걷는 김태식(金泰植), 한일진(韓一眞) 등을 만나 함께 독립운동을 결의했다. 윤봉길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가야 성공적인 독립운동을 추진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상하이를 향해 갔다.

그는 혼자 랴오둥 반도의 남단에 있는 다롄을 거쳐 산둥반도에 있는 칭다오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일을 하면서 돈을 모으고 독립운동 할 곳을 물색하기도 했다. 결국 19318월 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에 도착했다. 그는 프랑스 조계(租界 프랑스가 조차한 지역) 안에 있는 안공근의 집에 머물게 됐다.

그는 중국에서의 뜻있는 일을 위해 생활을 구상했다. 우선 경제생활을 위해 한국인인 박진이 경영하는 공장에서 일했다. 한편으로는 국제 활동을 위해 상하이 영어 학교에서 영어 공부도 병행했다. 그리고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지도자인 김구를 찾아가 그의 뜻을 말하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칠 것을 다짐했다.

일본은 1932년 자작극인 일본 승려 살해사건을 이유로 상하이 사변을 일으켰다. 일본군은 시라카와 대장의 지휘하에 전쟁을 승리했다. 일본군은 일본 국왕의 생일축일인 천장절과 전쟁 승리 두 가지를 축하하는 기념식을 갖기로 했다. 윤봉길은 이 기회를 택해 기념식장에서 거사를 하기로 결심했다. 그리하여 1932426일 한인애국단에 입단해 김구를 비롯한 이동녕, 이시영, 조소앙 등 지도자들과 협의해 거사를 구상했다.

윤봉길은 야채상으로 가장해 미리 기념식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입수하고, 기념식장에서 투척할 수류탄도 제조했다. 폭탄 제조 전문가인 김홍일의 도움을 받았다. 1932429일 윤봉길은 폭탄(저격용 물통 모양의 폭탄 1, 자결용 도시락 모양의 폭탄 1)을 감추고 식장에 입장했다. 그리고 식이 한참 진행 중일 때 식장으로 다가가 수류탄을 던졌다.

이 폭발로 시라카와 일본군 대장과 일본인 거류민단장 가와바다는 즉사했고, 3함대 사령관 노무라 중장과 제9사단장 우에다 중장, 주중공사 시케미쓰 등이 중상을 입었다. 식장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윤봉길은 현장에서 일본군에 체포됐고, 일본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193211, 일본으로 옮겨져 오사카 위수형무소에 수감됐다. 그리고 그해 1219일 총살형을 받고 25세의 젊은 나이에 순국했다. 이 사건은 중국 등 세계에 알려졌고, 중국의 지도자 장제스는 중국 100만 대군도 하지 못한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해냈다고 격찬했다.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매헌 윤봉길

훈격: 대한민국장

서훈년도: 1962

 

1929년 월진회를 설립하여 농촌 개혁 실시

1930년 중국으로 망명, 김구 등을 만남

1932년 홍구공원에 폭탄 투척, 침략 원흉 시라카와 등 처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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