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기획- 서울의 중심 중구의 역사 3
특집기획- 서울의 중심 중구의 역사 3
  • 인터넷편집부
  • 승인 2019.11.25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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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구 동네방네 이야기 시리즈

본지는 올해 창간 26주년을 기념하여 세계적인 도시로 발돋움하고 있는 서울시의 역사를 총 네 차례에 걸쳐 재조명해보았다. 서울 역사 고증 활동에 탄력을 받은 본지는 이번에 더 세부적으로 들어가 서울의 중심도시로 자리매김한 중구의 역사를 동별로 묶어 소개해보기로 했다.

 

2장 회현동 권역에서 제3장 명동권역

05. 봉래동1(蓬萊洞一街)

봉래동1가는 숭례문 남서쪽, 세종대로와 칠패로 사이에 위치한다. 봉래동1가의 동명은 이곳 일대에 있었던 봉래교(蓬萊橋)라는 다리 이름에서 유래하였다. 조선시대 초기 한성부 서부 반석방에 속했던 지역으로 일제 강점기에 봉래정1정목이라 불리다가 해방후 일제식 동명을 우리말로 바꾸면서 봉래동1가로 되었다.

조선 초 한성부를 552방으로 나눌 때 서부 반석방에 속하였으며, 1751년 편찬된 도성삼군문분계총록에 의하면 서부 반석방 고순청계연지계였고, 갑오개혁으로 행정구역의 변화가 있을 때 한성부 서서 반석방 고순청계 순동자암동, 연지계매동분동남정동연지동이었다. 191141일 경기도령 제3호로 서부 반석방일원이 되었다가 191341일 경성부 서부 반석방 순동자암동분동연지동남정동은행동매월동이 되었고, 이듬해 41일 경기도고시 제7호로 경성부 서부 순동자암동분동연지동남정동 각 일부와 은행동매월동을 합하여 근처에 있던 봉래교의 이름을 따서 봉래정1정목으로 하였다. 1943610일 부령 제163호로 중구 봉래정1정목이 되었다. 1946101일 일제식 동명의 우리말 개정 원칙에 따라 중구 봉래동1가로 개칭되었다.

봉래동1가는 북으로 남대문로4, 서소문동, 순화동과 접해있고, 서쪽과 남쪽으로는 봉래동2가와 접하고, 동쪽으로 남대문로5가와 이웃하고 있다. 근세 이후 서울의 관문인 서울역에 가까운 곳인데다 일찍부터 형성된 칠패시장이 인근에 있어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았고 이에 따라 옛지명도 비교적 많이 남아있는 곳이다.

남정동(藍井洞)은 남대문로5가와 접한 곳인데 쪽풀이 많이 심어져 있는 우물이 있으므로 쪽우물골이라 부른 데서 비롯되었으며, 매동(梅洞)은 매화나무가 많이 심어져있다 해서 붙여진 지명인데 매월동(梅月洞)이라고도 하며 강희맹(姜希孟)의 집터 근방에 있었다. 은행동(銀杏洞)은 은행나무 골이라고도 불렀는데 아름드리 은행나무가 있어서 붙여진 동명이다.

이 나무에서는 수십 가마의 은행이 열렸는데 특히 은행나무 밑을 신부 가마가 지나면 마을에 길운이 찾아온다고 하였으며 신부행렬이 잠시 멈추어서 준비해간 떡과 과일을 나무아래 두고 제사를 올려야만 부부화합이 잘 된다고 하였다.

개항 무렵 이 나무 아래를 지나는 처녀를 훔쳐보던 일본인이 상사병이 들어 나무에 목을 매달아 자살한 후부터 은행도 열리지 않고 나무는 자연 고사했다고 하는데 남대문에서 염천교방향으로 난 도로가 확장되면서 남아있던 밑동도 없어졌다. 봉래동148번지에는 칠패시장이 있었다. 칠패시장은 조선시대 한양의 대표적인 난전시장(亂廛市場)의 하나로, 특히 어물전이 유명하였다. 그 이유는 남대문과 서소문 사이에 자리 잡아 출입이 용이하고 용산마포 등과도 가까워 어물의 반입이 쉬웠기 때문이다.

칠패시장이라는 이름은 한성부의 순찰을 위해 현종 11(1670)부터 삼군문(三軍門)에서 한성부 전지역을 8()로 나누어 3일에 한 번씩 교대로 순찰한 데서 유래되었다. 남대문 밖에서 서빙고, 마포, 용산에 이르는 지역을 어영청(御營廳)에서 맡아 순찰함으로써 이 지역의 명칭이 비롯되었다.

칠패 등지의 어물상들은 18세기 중엽에 이르면 상권을 확대하여 내어물전보다 탁월한 상술을 발휘하였다. 이에 따라 외어물전은 차츰 관청의 신용을 얻게 되었고 어물반입의 요처에 외분 전을 여럿 설립하였으며 서남해상과 한강상의 수송어물을 독점적으로 매수하고 나아가 동북지방에서 육로로 통해 반입되는 어물까지 매점하기에 이른다. 대체적으로 내어물전이 봉건 말기의 변혁기에 사양길에 접어든 데 반해 외어물전은진취적이고 활기 있는 신진상업세력과 결합하여 이를 바탕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한편 봉래동1순화동의주로2가에 걸쳐서 자암동(紫岩洞)이라는 마을이 있었다. 이 마을의 이름은 염천교 동쪽 철도 근방의 바위가 자색 빛이 나기 때문에 자연(紫烟)바위자색바위자암잼배라고 부르는 데서 유래하였다. 자암동에는 조선시대에 객주(客主)가 많이 모여 있었다. 자암동의 객주가 취급했던 물품은 주로 건어물과 생선과일젓갈 등이었다. 이 가운데 거래량이 가장 많은 품목은 북어와 젓갈류인데 새우조개꼴뚜기밴댕이황석어 등으로만든 젓갈류가 주종을 이루었다.

자암동은 한음 이덕형이 출생한 곳이기도 하다. 어려서 장난이 매우 심했던 그는 백사 이항복과 함께 곧잘 어울리기도 하였다. 이덕형은 임진왜란 때 이항복과 함께 쌍벽을 이룬 인물로 군사와 외교에 눈부신 활약을 하여 전쟁이 끝난 후 선무공신(宣武功臣)의 호를 받았다.

한편 봉래동1가와 봉래동2가 일대는 1904년 이후 일본인이 날로 증가하여 회현동, 남산동, 명동일대와 같이 일본인들의 마을로서 피혁제화거리 촌이 형성되었다. 특히 수제화거리는 염천교옆 칠패로 일대에 수제화 전문업체 50여 개가 모여 있는 곳으로 1925년 일제 강점기 시절 경성역에 생긴 화물 창고에서 출발하였다. 창고로 들어갈 피혁(皮革)들이 밀거래되면서 잡화상과 피혁점, 구두수선점이 하나둘 생겨난 것이다. 해방 후에는 미군들의 중고 군화를 재활용해 신사화를 만드는 가게도 문을 열었다. 그리하여 1950년대부터 1층에는 상점, 2층에는 공장이 위치하는 형태로 구두거리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염천교 수제화거리의 수제화는 값이 싸고 품질이 좋아 큰 인기를 누렸고, 서울역과 인접한 지리적 특성을 활용해 전국을 대상으로 하는 도매시장으로 급성장했다. 하지만 2000년대부터 대형 제화업체와 값싼 중국산 구두에 밀려 점차 상권이 힘을 잃기 시작했다. 2014년에는 재개발계획이 세워져 수제화거리가 사라질 위기에 놓이기도 했으나, 현재는 90년 역사의 구두전문거리로서 한국 구두산업의 살아 있는 역사로 보존할 가치가 인정되어 재개발사업이 재검토 된 상태이다.

 

06. 봉래동2(蓬萊洞二街)

봉래동2가는 서울역 북쪽, 염천교 남쪽 일대에 위치하여 서울역과 철로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지역이다. 조선시대 초기 한성부 서부 반석방 일부에 속하였고 일제 강점기에 봉래정2정목이라 불리다가 1946101일 일제식 동명을 우리말로 바꾸면서 봉래동2가로 되었다. 봉래동2가의 동명은 이곳 일대에 있었던 봉래교라는 다리 이름에서 유래하였다.

서울역과 철로가 대부분의 면적을 차지하는 봉래동2가는 동쪽으로 남대문로5, 북쪽은 봉래동1가 및 의주로2가와 접하며, 남쪽은 동자동, 서쪽은 중림동 및 만리동1가와 서로 맞닿아 있다. 만리동1~2가 및 봉래동2가와 서로 접한 곳에는 가운뎃말 혹은 약전중동(藥田中洞)이라 부

르는 지역이 있었는데 약현으로 가는 가운데 동네라는 뜻이며, 마조미동(磨造米洞)은 매조미를 만드는 마을로 매조미골이라고도 하였다. 약현(藥峴)은 약봉(藥峰) 서성(徐省)이 살았던 곳으로약밥과 약주의 어원이 되는 지역이기도 하다. 봉래동2122번지에는 남대문역이 있었다. 190411월 서울~부산 간 철도가 개통되면서 이듬해 525일 지금의 역보다 약간 남쪽 지점으로 옮겨서 개통식을 하고 남대문 정거장이라 했는데 건평은 15평에 불과하였다.

이곳은 191992일 강우규(姜宇奎, 1885~1920) 의사가 사이토 마코토[齊藤實] 총독을 저격했던 장소이기도 하다. 강우규는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찬구(燦九)호는 왈우(曰愚)로 평안남도 덕천군 무릉면 제남리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30세 때 함경남도 흥원으로 이사하여 ,한의술로 환자를 치료하면서 기독교에 입교하여 장로가 되었고, 학교를 설립하여 청년들에게 신학문을 가르쳤다. 1910년 국권피탈 후 만주로 건너가 지린성[吉林省] 라오허현[饒河縣]에 정착하여 신흥촌(新興村)을 건설하고동광학교(東光學校)를 세워 교육사업에 진력하였다.

31운동이 일어나자 박은식(朴殷植)김치보(金致寶) 등과 상의하여 조국에 돌아가 거사할 것을 자원, 영국제 폭탄을 가지고 서울에 잠입하여 제3대 조선총독으로 부임하는 사이토 마코토를 폭살하기로 계획하였다.

191992일 남대문역을 비롯하여 남대문에서 용산에 이르는 연도에는 많은 사람과 함께 무장 군인과 경찰로 엄중한 경계가 이루어졌다. 오후 5시 도착한 사이토 총독의 환영인사와 함께 21발의 예포소리가 끝나고 일행이 마차에 오를 때 강우규 의사는 들고 있던 폭탄을 던졌다. 사이토를 맞히지는 못했지만 무라다 육군소장, 고무다 혼마치[本町] 경찰서장, 구보 만주철도이사 등에게 중경상을 입혔다. 수수한 시골노인 차림의 강우규는 숙소인 안국동으로 돌아온 후 2차 거사를 준비하면서 경찰과 헌병의 눈을 피해 가회동의 장익규, 사직동의 임승화 집으로 숙소를 옮기던 중 체포되어 구치소에 수감되었다. 이듬해 4월 사형언도를 받고 복심법원와 고등법원에 항소하였으나 사형이 확정되었고 동년 1129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어 순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현재 옛 서울역사 앞에 동상과 기념표지석이 세워져있다.

한편 옛 서울역사는 일제 강점기인 19226월에 착공하여 19259월에 준공되었다. 지하 1, 지상 2층 건물로, 연면적은 6,836, 대지면적은 23만여이다. 구조는 철근콘크리트로서 부분적으로는 화강석을 사용하였는데, 시공은 조선호텔을 지은 아오미 하지메가 맡았다. 서울역사는 현재 남아 있는 일제 강점기의 건축물 중 가장 뛰어난 외관을 갖추고 있어 19819월에 사적 제284호로 지정되었다. 가장 큰 특징은 중앙의 돔이다. 르네상스건축양식에서 이용되는 펜던티브(pendentive)를 이용하여 사각형의 평면에 돔을 올려놓았는데, 펜던티브와 돔을 결합시켜 높이를 낮춤으로써 시각적인 안정감을 주었다.

광복후 서울역사는 늘어나는 수송량을 감당하기 위하여 1960년대에 남부 및 서부 역사를 신설해 원래 역사와 구분하여 사용하였다. 20041월 서울역(신청사)이 신축되면서 구 역사는 폐쇄되었다가 20118월 원형복원공사를 마친 후 문화역 서울284’라는 이름으로 개관했다. 현재는 주로 공연전시세미나회의 등을 위한 다목적홀로 이용된다.

서울역 신청사는 1925년 건설된 옛 서울 역사를 대신하여 2004KTX열차 개통과 함께 서울통합 민자 역사로 새롭게 신축한 것이다. 신축된 역사는 지하 2층 지상 5층의 건물로, 아울렛대형할인점 등이 입주해 있으며, 경부고속철도공항철도경부선경의선 등의 시발역이자 종착역이다.

한편 남대문시장의 퇴계로와 지하철 1호선이 관통하는 봉래동284번지는 제중원이 있던 자리로 후일 세브란스병원 및 부속의과대학 자리였으나 연희전문학교와 병합하여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이 되면서 신촌캠퍼스로 이전하였고 지금은 세브란스빌딩이 서있다. 서울역 앞은 대부분 불량 주택 지구였는데 1970년대부터 시작한 도심재개발로 대부분 정비되어 산뜻하게 단장되어있다.     [자료제공= 중구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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