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기획-서울의 중심 중구의 역사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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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터넷편집부
  • 승인 2020.01.14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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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구 동네방네 이야기 시리즈

본지는 경자년 올해 창간 27주년을 기념하여 지난해부터 세계적인 도시로 발돋움하고 있는 서울시의 역사를 총 네 차례에 걸쳐 재조명해보았다. 서울 역사 고증 활동에 탄력을 받은 본지는 이번에 더 세부적으로 들어가 서울의 중심도시로 자리매김한 중구의 역사를 동별로 묶어 소개해보기로 했다.

 

3장 명동권역

03. 장교동(長橋洞)

청계천복원공사로 새롭게 놓인 장통교와 삼일교 사이 남쪽에 위치한 장교동(長橋洞)은 조선시대 초기 한성부 남부 대평방(大平坊)과 훈도방(薰陶坊)의 일원이었던 지역이다. 도성삼군문분계총록편찬 당시에는 남부 대평방 보십내계(甫十內契)보십외계(甫十外契)와 훈도방 묵정동계(墨井洞契)혜민서계(惠民署契)저전동계(苧廛洞契)정승계(政丞契)였다. 191010월 칙령 제357호와 부령 제7호로 경기도 경성부 태평방 훈도방 일원에 속하게 되었고 191141일에는 경기도령 제31호로 경성부 남부 태평방(太平坊)훈도방 일원이 되었다. 191441일 경기도령 제3호와 경기도고시 제7호로 경성부 각동 명칭과 관할구역을 새로 정하면서 남부 장교동과 하리동(下犁洞)조동(棗洞)저동(苧洞)혜민동(惠民洞)묵정동(墨井洞) 각 일부를 합하여 장교정(長橋町)으로 하였다.

1943610일에 구제시행으로 장교정은 중구의 관할구역이 되었다. 그 후 1946101일 일제식동명을 우리말로 바꾸면서 장교동이 되었다. 장교동의 동명은 청계천에 놓여 있던 장통교(長通橋)의 줄임말인 장교(長橋)에서 유래되었다. 장통교는 장교동 51번지와 종로구 관철동 11번지 사이에 있던 다리로 이 근처에 장찻골로 불리는 마을이 있었기 때문에 장찻골다리라고도 불렀다. 또는 이 다리 부근에 긴 창고가 늘어서 있어 장창교(長倉橋)라고도 하였다. 장통교는 백악산과 인왕산 방면의물이 우회하고 꺾여지나오다가 이 다리를 지나면서 남대문과남산 방면에서 흘러 내려오는 개천까지 합하여 비로소 일직선으로 오간수문(五間水門)을 지나 영미교(永尾橋) 방면까지 물 흐름이 길게 이어지기 때문에 길게 통한다는 뜻의 장통교가 되었고 줄여서 장교라고 하였다. 다리 서쪽 기둥에 신미개조(辛未改造)기해개조(己亥改造)’라는 여덟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장교동의 위치를 살펴보면 북쪽으로는 청계천로를 사이에 두고 종로구 관철동과 마주보는 구 경계를 이루며, 남쪽으로는 을지로2가와 접하고 있다. 동쪽으로는 수표동과 접하고 있으며, 서쪽으로는 수하동과 이웃하고 있다. 장교동의 전체적인 지형은 사각형을 이루고 있으며 남북으로 삼일대로가 통과한다.

삼일대로는 용산구 한남동726-110에서 종로구 재동 99-1까지를 잇는 왕복 6~8차선 도로로 31 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19661126일 삼일로라 칭하였다가 2010422일 남산1호 터널구간을 편입하면서 현재의 도로명으로 바뀌었다.

 

장교동에 있던 자연마을가운데 대추나무골은 을지로2가와 장교동에 걸쳐있던 마을로 대추나무가 많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한자명으로는 대조동(大棗洞) 혹은조동(棗洞)이라고도 하였다. 먹우물골은 수표동, 장교동, 을지로2가에 걸쳐있던 마을로 우물이 깊어 물이 검게 보이므로 먹우물이라 불렀던 것이 인근 부락 이름이 되었으며 한자로 묵정동(墨井洞)이라 하였다.

모시전골은 저동1, 충무로2, 명동1~2, 을지로2가와 장교동에 걸쳐 있던 마을인데 이름 그대로 모시를 파는 시전이 있었으므로 유래되었고 한자명으로는 저동(苧洞)이라하였다. 수하동, 장교동, 을지로2가에 걸쳐있던 아래보습곶이는 삼각동의 지형이 농기구의 보습과 같다고 하여 생겨난 마을 이름으로 보습곶이의 아래쪽이 되므로 아래보습곶이라 하였고 한자명으로 하리동(下犁洞)이라 하였다. 혜민서골은 을지로2, 수표동, 장교동에 걸쳐 있던 마을로서 혜민서가 있어 혜민서골이라 하였으며, 한자명으로는 혜민동(惠民洞)이라 하였다. 혜민서는 을지로2192번지에 있던 의료기관으로 서민의 병을 치료해 주고 여의(女醫)를 교육하고 양성하던 일을 맡았던 관청이다.

장통교가 있던 남쪽의 장교동 일대와 북쪽의 관철동 일대는 지금도 많은 상가들이 들어서 있는데 이러한 상황은 옛날에도 마찬가지였다. 부근에는 갓전, 관자전(貫子廛), 소금전, 신전을 비롯해서 모자, 양털, 베 등을 파는 청포전(靑布廛), 모시전 등이 있어 많은 상인들과 사람들의 왕래로 바쁜 지역이었다. 한편 장교동 63-1번지에는 지방 민속자료 7호로 지정된 한규설(韓圭卨, 1848~1930) 가옥이 있었다. 이 집은 을사늑약 체결 때 끝까지 반대하여 파직당한 한규설 대감이 1890년 무렵 살았던 집으로, 1980년경 장교동 일대가 재개발되어 철거되자 국민대학교에서 매입하여 대학교 내로 이건(移建)하고 본래의 모습을 보완한 후에 현재 명원민속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장교동에 있을 당시 한규설 가옥은 새로운 추세에 따라 절충식으로 지은 한옥으로 서양식 난방법을 이용하였는데 이건하기 전 모습을 살펴보면 대로에서 서북방으로 들어선 좁은 가로에 면하여 동남향의 솟을대문이 있었다. 이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행랑마당이 되고 서쪽에 사랑채, 북쪽에 안채, 사당간, 광채 등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본래는 중문간 행랑채와 사잇담돌이 있었다고 생각되나 후일 철거 된듯하다.

장교지구재개발사업으로 성북구 정릉동 국민대학교 구내로 이건하면서 건축 이래 개작된 부분과 철거된 사랑채와 안채사이의 사잇담, 대문간채 등도 모두 복원하였다.

장교지구재개발사업은노후된건축물과불량주택상태로도시미관을 해치고 서울 중심부에 위치하면서도 토지 이용가치가 낮은 지역에 대한 정비 방안으로서 시행된 것이다. 1962120일 공포된 도시계획법에 따라 시행된 것으로 서울 도심재개발사업의 시초격이라고 할 수 있다. 1970년대까지 서울 시내에서 인쇄소가 가장 밀집된 지역은 을지로 12가의 장교동 일대였으나, 1983년 장교동 재개발 사업이 본격적으로 착공되면서 장교동에서 철수하는 업체들이 인현동 일대로 이전하여 새로운 인쇄골목을 형성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재개발사업으로 장교동 일대는 노후 한 건물대신 현대식의 고층건물이 들어서 새로운 모습으로 재탄생하였다.

현재 장교동에는 한화빌딩, 장교빌딩, 서울고용노동청, 그리스대사관, 우리은행한화금융센터, 롯데시티호텔 명동점 등이 위치해 있으며, 청계천 주변으로 광장이 조성되어있어 직장인시민들의 휴식처가 되고 있다.

04. 무교동(武橋洞)

청계천 모전교 남쪽, 무교로 좌우 지역인 무교동(武橋洞)은 조선시대 초기 한성부서부 여경방황화방과 남부 광통방, 중부 서린방 각 일부에 해당하는 지역이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무교정(武橋町)이라 불리다가 1946101일 일제식 동명을 우리말로 바꾸면서 중구 무교동으로 개칭되었다. ‘무교동이라는 명칭은 조선시대 이 부근에 무기 제조 및 관리를 맡아보던 군기시(軍器寺)라는 관아가 있었는데 이를 모전교 부근의 모교동(毛橋洞)과 구별하기 위해 붙여진 것이라 한다.

군기시는 서울특별시청과 한국프레스센터 자리에 있었다. 조선태조 때 고려시대의 제도를 따라 서한성부 서부 황화방에 군기감(軍器監)을 두었는데, 1466(세조12)에 군기시라 개칭하였다. 조선 개국과 함께 고려 말에 화약화포를 제조하여 왜구 소탕에 공이 컸던 최무선(崔茂宣)이 판군기감사(判軍器監事), 그의 아들 최해산(崔海山)이 부정(副正)으로 있었다. 화약을 취급하던 군기시는 1884(고종21)에 기기국(機器局)에 합쳐졌고, 갑오개혁 때 폐지되었다.

무교동의 위치는 북쪽으로는 청계천로를 경계로 종로구 서린동과 마주보는 구 경계지역이며 남쪽으로는 을지로1가와 연결되어 있으며 서쪽으로는 태평로1가와, 동쪽으로는 다동과 접하고 있다. 지금의 무교동 지역에 있던 옛 자연마을을 살펴보면 국수집이 많았다는 국숫골[麵洞]이 있었고 팥죽골이라 해서 팥죽을 파는 두죽동(豆粥洞) 등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오늘날 이 지역에 대중음식점이 밀집되어 있는 까닭도 옛날부터 이어져온 전통이 아닌가한다.

한편 큰 정동이라 불린 대정동(大貞洞)은 태평로1가와 정동 사이에 걸쳐 있었고, 도동(刀洞) 또는 도자전(刀子廛)골이라 불리던 도자동(刀子洞)은 태평로1가와 무교동에 걸쳐 있었는데 방물전(方物廛)인 도자전(刀子廛)이 있으므로 근방의 마을 이름이 되었다. 모교(毛橋)는 무교동 3번지 효령빌딩과 서린동 149번지 서린 호텔 사이를 이어주는 청계천 위에 놓였던 다리로 토산과일을 팔던 모전(毛廛)이 근방에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다. 모교 주변에 형성된 마을을 모전다리모교동이라 불렀는데 무교동과 다동일대에 걸쳐있던 마을로 모동(毛洞)이라고도 하였다.

모전을 중심으로 무교동과 서린 동쪽을 이어주던 다리는 웃모전다리, 무교동24-2번지와 다동의 체육회관 앞을 연결하던 다리는 아래모전다리라 불렀는데 웃모전다리는 모교, 아래모전다리는 무교로 불렀다. 모교는 원래 나무로 만든 다리였는데 태종12(1412) 종묘동구(宗廟洞口) 서쪽의 개천을 석축(石築)으로 쌓고 동쪽은 목축(木築)으로 할 때 석교(石橋)로 바꾸었다.

개축 당시에는 신화방동(神化坊洞) 입구교(入口橋)라 하였으나 영조 때 만든 도성대지도에 모전교로 되어 있다. 무교는 부근에 군기시가 있었기 때문에 군기시교, 군기시전교, 군섯다리, 군기섯 다리라고도 불렀다.

군기시는 병기 등 군대의 소용물을 관장하던 관아였다. 동국여지비고에 의하면 군기시 안에 연못이 하나있었는데 1580(선조 13) 5월 어느 날, 이 연못에서 갑자기 물줄기가 하늘 높이 솟구치더니 그로부터 14년 뒤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사동(篩洞)은 태평로1가와 무교동에 걸쳐 있던 마을로 체를 만드는 집이 많이 모여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으로 쳇골이라고도 하였다. 웃다방골 혹온 상다동(上茶洞)이라 불렀던 곳은 다동과 무교동에 걸쳐 있었는데 다동 가운데 가장 서쪽에 위치했으므로 붙여진 명칭이다. 이 일대에는 찻집[茶房]이 많이 집중되어 있어서 지금도 옛 지명을 그대로 이어주고 있다.

무교동의 동명 유래가 된 병기의 제조 관리를 맡아보던 군기시는 태평로131번지 서울특별시청과 동 30번지 서울신문사 자리에 있었다. 고종 21(1884)에 기기국(機器局)에 합쳐졌고 고종 31년에 폐지되었다. 광무 8(1904)에 군기감의 후신으로 군기창을 설치하고 군기와 탄약을 만들었으나 1907년 일제의 탄압으로 이것마저 폐지되었다.

군기시에 예속되었던 화약고는 소격서 자리와 궁권 안의 자문감(紫門監)에 있었다. 군기시 앞에서는 반국가 행위를 하거나 이에 관계한 중죄인의 공개 처형을 함으로써 군율과 국가기밀보전을 유지하고자 하였다.

현재 청계천과 청계광장 주변으로 각종 음식점과 카페가 들어서 있고, 해마다 다동과의 인접지점인 전통음식 관광특구 문화거리에서 다동무교동 음식문화 가을대축제가 열리고 있다.

널리 알려진 무교동 낙지 이 외에도 맥주와 골뱅이, 전통 냉면집 등 1960년대부터 인근 직장인들이 회식을 위해 찾았던 많은 식당들이 작은 골목 사이로 들어서 있다.

오늘날에는 사무직 회사원들이 근무하던 대표적인 지역이라는 명성은 다소 없어졌지만, 청계천이 복원되면서 많은 시민과 관광객들이 찾는 먹거리촌으로 변모해가고 있는 지역이라 할 수 있다.

05. 다동(茶洞)

청계천 광통교 남쪽, 청계천로와 남대문로 주변에 위치한 다동(茶洞)은 조선시대초기 한성부 남부 광통방의 일부였다. 일제 강점기에는 다옥정(茶屋町)으로 불리다가, 1946101일 일제식동명을 우리말로 바꾸면서 중구다동으로 개칭되었다. 다동은 조선시대에는 궁중의 다례(茶禮)를 주관하던 사옹원(司餐院) 소속의 다방(茶房)이란 관아가 이곳에 있어서 다방골이라 하던 것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신라시대 때부터 승려들이 차를 마시던 풍습이 있었고, 고려시대에는 무역이나 외국사신 접대로 차를 마시는 끽다(喫茶)의 풍습이 있었는데, 이 풍습이 조선시대에도 계승되어 왕이 중국사신을 창덕궁 인정전(仁政殿)에서 접견할 때 인사말이 있은 후 곧 다례가 있었다.

조선 고종 때 국가에 진연(進宴)이 있을 때 평양진주대구해주에서 기생들이 서울로 뽑혀 와 이곳 다동에 모여 살았다. 이후 1909년 관기제도가 폐지되자 남도와서도 기생들도 대거 상경하여 조합을 형성하기도 하였다. 당시 이곳 다동에 살던 기생들은 시조와 가사(歌辭)에도 뛰어나기로 유명해져서 다방골기생이라는 애칭이 생겨나기도 했다.

다동과 무교동에는 197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유명한 낙지골목이 있었으나 재개발사업으로뿔뿔이 흩어졌고, 1980년대에는 극장식 술집과 여러 오락장, 대중음식점 등이 성행하였으나 이 역시 강남이 개발되면서 옮겨갔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많은 금융기관들이 밀집해 있었다.

현재는 예금보험공사한국씨티은행한국관광공사 등이 위치하고 있으며, 해마다 무교동과의 인접지점인 전통음식 관광특구 문화거리에서 다동무교동음식문화가을대축제가 열리고 있다.

풍수지리설에 따르면 다동의 지형은 거북이 모양으로 옛날부터 전쟁 중에도 재해를 입거나 파괴, 화재 등이 일어난 적이 없으며 변란도 피해가는 지형이라 한다. 현재 다동의 위치는 북쪽으로는 청계천로를 경계로 종로구 서린동과 마주보는 구 경계지역이고, 남쪽으로는 작은 길을 사이에 두고 을지로1가와 접하며 동쪽으로는 남대문로1가와 접하고 서쪽으로는 무교동과 인접하고 있다.

다동은 과거 대다방과 소다방이 있었으므로 다방골 또는 다동이라 하다가 갈라서 웃다방골, 가운데 다방골, 아랫다방골이라 하였다. 웃다방골인 상다동(上茶洞)은 지금의 다동과 무교동에 걸쳐 있었으며, 가운데 다방골인 중다동(中茶洞)은 지금의 다동지역이고, 아랫다방골인하다동(下茶洞)은 다동과 남대문로1가에 걸쳐있었다.

다동은 그 동명에서 알 수 있듯 예부터 사옹원에 속한 다방이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차를 마시는 풍습은 이미 신라시대부터 승려들 사이에서 성행하였으며 고려시대에 와서는 중국과의 빈번한 외교무역관계로 궁중 관리들 간에도 차를 마시는 풍습이 조성되고 국가의식이나 외빈접대 등이 있을 때에는 진다(進茶)의 의식이 정해져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사헌부에서 다시(茶時)’라 하여 사람들이 일시 모이는 일이 있었는데 언관(言官)들은 서무를 보지 않았기 때문에 하루에 한 번씩 모여 차를 마시고 헤어지는 풍습이었다. 그러나 조선 초기 중국에서 사신이 올 때만 그들에게 차를 대접하는 것으로 바뀐데다가 국가에서 차의 공상(供上)을 각 지방민에게 요구하자 이를 감당키 어려웠던 백성들이 차나무를 베어내는 바람에 점차 나무의 숫자가 줄어들었고 또 차를 건조하는 과정이 복잡하여 계승되지 않았기 때문에 차 마시는 풍속은 물론 사헌부의 다시도 없어졌다. 광해군 5(1613)에 동래 왜관에서 전파된 담배가 차를 대신하면서 차 마시는 풍습은 현격하게 줄었다.

 

한편 고종 말년에 국가에 행사가 많았고 그때마다 진연이 행해지면서 많은 기생들이 뽑혀 서울로 왔다. 평양 기생이 제일 많았고 다음으로 진주, 대구, 해주에서 온 기생이 많았는데, 이들은 진연이 끝난 후에도 서울에 머물며 영업을 하였으며 주로 다동에 모여 살았다.

1909년 관기제도가 폐지되어 남도와 서도 기생들도 대거 상경하여 합세하자 1913년 서도 출신 기생을 모아 다동조합을 구성했는데 약 30명 정도의 기생들이 모였다.

이 무렵 서울과 남도 출신 기생들도 모여 광교 기생조합을 구성하였다. 광교기생조합은 뒤에 한성조합으로 바뀌었다가 1914년에 일본식 이름을 모방하여 한성권번(漢城券番)으로 바뀌었는데 등록된 기생의 수가 약200명에 달했다.

오늘날 다동무교동 일대는 서울시청을 중심으로 을지로, 태평로, 남대문로 대로에 들어선 빌딩에 근무하는 직장인들이 많이 찾는 골목으로 전통적인 맛 집들이 많이 들어선 명소이다. 1996년부터 매년 다동무교동 음식문화 가을대축제를 개최하고 있으며, 다동무교동 전통음식 관광특구는 2000년 신설된 명동관광특구가 확장되면서 2012년 지정된 음식문화의 거리이다.

다동과 무교동을 포함해 관광특구로 지정된 곳은 명동세종호텔 옆 도로(삼일대로)에서부터 시작해 퇴계로를 따라 신세계백화점을 지나 남대문시장, 프라자호텔, 시청 앞, 청계광장, 광통교, 장교빌딩에서 다시세종호텔까지다. 이곳은 서울시의 중심지로서 지명도가 매우 높고 교통이 편리하여 내국인은물론 외국인들이 많이 찾는 지역으로, 관광특구로서의 기반여건이 충족되어있는 관광쇼핑의 명소지역이다. (자료제공: 중구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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