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기획- 서울의 중심 중구의 역사 16
특집기획- 서울의 중심 중구의 역사 16
  • 인터넷편집부
  • 승인 2020.06.18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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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구 동네방네 이야기 시리즈

본지는 올해 창간 27주년을 기념하여 지난해부터 세계적인 도시로 발돋움하고 있는 서울시의 역사를 총 네 차례에 걸쳐 재조명해보았다. 서울 역사 고증 활동에 탄력을 받은 본지는 이번에 더 세부적으로 들어가 서울의 중심도시로 자리매김한 중구의 역사를 동별로 묶어 소개해보기로 했다.

 

3장 명동권역

16. 남산동1(南山洞一街)

퇴계로 남쪽, 지하철 4호선 명동역 서쪽 4번 출구에서 남산 케이블카 매표소까지를 아우르는 남산 기슭에 위치하는 남산동1(南山洞一街)는 조선시대 초기 한성부남부 명례방에 속했던 곳으로 일제 강점기 남산정1정목(南山町一丁目)이라 불리다가 1946101일 일제식 동명을 우리말로 바꾸면서 남산동1가로 되었다.

남산동이라는 동명은 이곳 일대가 남산 북쪽의 기슭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 하였다. 특히 남촌 중에서 남산 계곡에 위치한 남산동에는 가난한 선비와 청렴결백을 자부하던 양반들이 살았으며 이들을 남산골샌님 또는 남산골 딸깍발이로 칭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남산골샌님이 원하나 내지 못해도 뗄 권리는 있다는 속담이 전한다. 유사한뜻으로 남산골샌님이 신청안 고직(庫直)이 시킬 재주는 없어도 뗄 재주는 있다는 속담도 전하는데, 아무 세력 없는 남산골샌님이 고직이를 시켜 줄 수는 없어도 여론을 일으켜 못하게 할 수는 있다는 뜻으로, 무슨 일을 해줄 수는 없어도 방해 하여 못하게 할 수는 있음을 이르는 말이다. 그 밖에도 남산골샌님을 주제로 한 속담으로 남산골샌님이 역적 바라듯 한다”, “남산골샌님이 망해도 걸음 걷는 보수는 남는다등도 있는데, 앞의 속담은 가난한 사람이 엉뚱한 일을 바라는 것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고, 뒤의 속담은 남산골 선비가 망하여 아무것도 없어도 그 특이한 걸음걸이만은 남는다는 뜻으로, 몸에 밴 버릇은 없어지지 않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남산동1~3가가 북쪽자락에 자리한 남산은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서울의 녹지공간으로서 큰 몫을 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서울 남쪽 수비의 요새로 만들기 위하여 능선에 성을 쌓았는데 일부구간을 제외하고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남산의 야경
남산의 야경

해발 265미터의 남산은 현재 중구 남산동을 위시하여 예장동, 필동, 회현동, 장충동과 용산구 도동, 후암동, 이태원동, 한남동 등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옛날에는 서울의 남산쪽이었지만 구역이 훨씬 확장된 오늘날은 서울의 중앙산이라 할 수 있다. 예부터 남산은 서울 사람들의 행락지로 사랑을 받아왔는데 조선시대에도 지금의 자연보호운동과 같이 남산에 성곽을 쌓아 입산을 금지시키고 나무를 베거나 흙과 돌을 파가지 못하게 하는 한편 묘를 쓰지 못하게 하였다. 순조32(1832)에 오위장(五衛將)을 지낸 장제급(張濟汲)이라는 자가 모친의 시신을 몰래 남산에 묻고 묘를 만들었던 일이 발각되었다. 조정에서는 즉각 묘를 파내고 이를 명당이라 가르쳐준 지관과 장제급을 귀양 보냈으며 그의 가족들은 노비가 되는 중벌을 받기도 하였다.

실제로 도성을 둘러싼 4개의 산 중에서 남산은 비교적 정상으로 오르는 길이 완만하고 주위가 수목으로 둘러싸여 사계절의 풍경이 아름답기 그지없다. 이 때문에 풍류를 즐기던 옛 사람들이 남산을 소재로 하여 읊은 시가 매우 많다. 고려 말과 조선 초에 활동한 시인인 교은(郊隱) 정이오(鄭以吾)남산팔영(南山八詠)을 지어 남산의 그림 같은 풍경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북악 아래 안개구름 속에 펼친 궁궐이 보기 좋고

멀리 펼쳐진 한강물 더욱이 볼만하네.

봄이 다 지나도 아직 피어있는 바위 밑의 꽃과

산마루에 우뚝 선 낙낙장송의 의젓한 모습이 좋구나.

춘삼월 답청놀이와 중양절 높은 산 오를 때도 좋고

관등놀이로 산언덕 환하고 계곡에 발 담그는 멋 또한 있구나.

 

현재 서울남산초등학교가 위치한 자리에 나홍좌(羅弘佐) 장군이 살았기 때문에 나대장골 혹은 나동(羅洞)이라 불렀다. 나홍좌는 조선 후기의 무신으로 1699(숙종25) 어영대장을 거쳐 한성부좌윤, 포도대장, 3도통제사 등을 역임한 인물이다. 또한 남산동240번지 일대를 옛날에는 삼아동(三丫洞)이라고 불렀는데, 이 마을의 바위에 삼아동이란 세 글자가 새겨져 있었던 데서 유래한 것이다. 삼아동 아래에는 물이 달고 찬 암천(岩泉)’이라는 샘이 있었는데, 이 샘가의 암벽에도 아계(丫溪)’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남산에는 특히 많은 약수가 있었다.

남산동1가의 관할구역 경계와 「서울 지도」(1902)의 남산동 부근
남산동1가의 관할구역 경계와 「서울 지도」(1902)의 남산동 부근

그중 와룡암(臥龍庵) 아래에 있는 속칭 부엉바위 약물이라고 불리는 휴암약수는 절벽 사이를 흘러내리는 약수터로 여름철에는 피서를 하거나 산책하는 사람들의 발길이 끓이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인근에 세워져 있던 천석각(泉石閣)이라는 누각은 피서하기에 아주 좋은 곳으로 이름나 있었다. 옛 문헌에도 이러한 사실들을 기록하여 휴암천은 목멱산 아래 있고 삼아동의 물맛도 달고 차다고 하였다. 곧 삼아동의 물맛이 가장 품격이 높다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휴암천과 가까이 있음을 암시해주었던 것이다. 또 허정(許井)이라 불리는 우물이 있었는데, 이는 옛날 남산 위에 있던 목멱신사(木覓神祠)에 제사 드릴 때쓰던 우물이라고 한다. 이곳에는 묘소에 세우는 것과 같은 석인상(石人象)이 있었다고도 한다.

남산동 249번지에는 복천암(福泉岩)’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바위가 있었다. 이 일대 또한 옛날부터 명승지로 유명하던 곳으로 조선 말기의 덕망 있는 대신 경산(經山) 정원용(鄭元容)이 정계의 여러 명사들을 초청하여 하루를 즐기면서 이곳의 풍경을 시로 표현하기도 하였다. 윤달이 낀 어느 봄날 복천암에모여무르익은봄날의흥취를그는다음과같이노래하였다.

 

남산 밑 우리 집엔 봄만 되면 경치도 좋아.

마음 내키면 술 한 잔 들고 승경 찾아 산책도 하네.

숲속을 거닐다 흥 절로 나면 노래 부르고 시로 읊는데 시내 따라 방초로(芳草路) 거닐면 어느 사이 삼차동(三叉洞) 지난다네.

 

삼차동(三叉洞)은 곧 삼아동(三丫洞)을 말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남산동22번지에는 옛 호위청(扈衛廳) 터가 있었다. 호위청은 인조반정(仁祖反正) 후의 흉흉한 민심에 대비하여 궁궐을 경호하던 기관으로, 훈신(勳臣)이 대장으로 임명되었다. 소파길 아래 남산동 226번지에 있는 외교구락부는 지난날 정치외교계의 인물들이 만나는 장소이기도 하였다.

한편 지금의 서울특별시 중구 퇴계로2056(남산동226-8)에는 교서관이 있었다. 교서관(校書館)은 조선시대 경서(經書)의 인쇄나, 제사 때 쓰이는 향()축문(祝文)인장(印章) 등을 담당하던 관청이다. 조선의 건국과 함께 고려의 제도를 계승하여 교서감(校書監)을 설치하고 서적과 축문 관련 업무를 관장하게 한 것이 교서관의 시작이다. 일명 운각(芸閣), 내서(內書), 외각(外閣) 등으로 불리었다. 교서관은 설치 당시에 교서감이라 불리었고, 태종 때에 명칭이 교서관으로 바뀌었다. 세조 때에는 전교서(典校署)로 불리다가 1484(성종 15)에 교서관으로 개칭되어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등재되었다. 원래 교서관은 남부 훈도방(薰陶坊)에 위치해 있었는데, 지금의 중구 남산동2가 전 외교구락부 인근에 해당한다. 병자호란 뒤에 중부 정선방(貞善坊)으로 옮겼다가 후기에는 남부 낙선방(樂善坊)으로 이전하였다.

교서관의 관원들은 모두 문관이었으며, 전서체에 익숙한 3인을 품계에 따라 겸임하도록 하였다. 교서관의 판교(判校) 1인은 타관이 겸하고, 교리(校理) 1인과 별좌(別坐) 2인을 비롯 각급 직제에 걸쳐 모두 20여 명이 소속되어 있었다.   [자료제공:  중구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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