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훈처(처장 박삼득)는 광복회‧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일제강점기 김좌진 장군의 부관으로 청산리 전투에 참가해 대승을 이끈 항일독립투사 박영희(1896~1930) 장군을 10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박영희 장군의 호는 검추(劍秋), 일명은 두희(斗熙)·초변(草變)·영섭(寧燮)이다. 충청남도 부여(扶餘)에서 출생하였다. 휘문의숙(徽文義塾) 재학 중인 1915년 은사 이시영(李始榮)과 함께 만주로 망명해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에 입학, 졸업 후 교관(敎官)과 학도감(學徒監)으로 근무했다.
1919년 8월 대한정의단(大韓正義團)이 무장독립투쟁 수행을 위해 대한군정부(大韓軍政府)로 개편될 때 서일(徐一)·현천묵(玄天默)·김좌진(金左鎭)·계화(桂和)·김규식(金奎植)·이범석(李範奭) 등과 함께 주요 간부로 참여했고,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사관연성소에서 학도단장을 맡아 사관생도를 교육했다.
1920년 8월에는 사령관 김좌진의 부관으로 청산리전투에 참가해 대승을 이끌었다. 1924년 1월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에 가입해 김좌진·신일헌(申日憲)·한함산(韓咸山)·최대갑(崔大甲)·조생갑(趙生甲) 등과 함께 항일무장투쟁을 했으며, 5월에는 북로군정서의 재정비에 따라 행정부장에 임명됐다.
또한 1925년 3월 닝안[寧安]에서 신민부(新民府)가 조직될 때 김좌진·남성극(南星極)·유현(劉賢) 등과 같이 대한독립군단 대표로 참가, 신민부보안사령관으로 임명되어 군사 활동에 주력했고, 신민부가 목릉현(穆陵縣) 소추풍(小秋風)에 설립한 성동사관학교(城東士官學校)에서 백종렬(白鍾烈)과 함께 교관으로서 독립군을 양성했다.
그 후 소련으로부터 항일운동 협조를 받기 위해 신민부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파견됐다가 1930년 고루지게에서 공산당원에 의해 피살됐다. 1968년에 대통령표창을,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각각 추서됐다.
훈격: 독립장
서훈년도: 1977년
주요공적:
1920년 김좌진 장군 부관으로 청산리 전투 대승
1924년 대한독립군단에 가입, 항일투쟁 전개
1925년 신민부 보안사령관, 성동사관학교 교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