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훈처(처장 박삼득)는 광복회‧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일제강점기 일제 탄압으로부터 자결로서 항거한 부자(父子) 독립운동가인 류도발(1832(순조 32)∼1910)선생과 류신영 선생(1853~1919)을 1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먼저 류도발 선생의 본관은 풍산(豊山)이며, 자는 승수(承叟)이고 호는 회은(晦隱)이다. 1832년 경상북도 안동(安東)에서 출생했다. 그의 아버지는 세자시강원부수(世子侍講院副率) 진휘(進徽)이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했고 어려운 사람을 보면 항상 찾아가 도와주는 등 천성이 의연하고 지조가 있었다. 중년에 여러 번 이사를 하여 경상북도 군위군(軍威郡) 비안면(比安面) 덕암리(悳岩里)에서 농사를 짓고 살았는데, 1910년 8월 일제에 의해 국권이 피탈됐다는 망국의 소식을 듣고 통분함을 참지 못하여 고향으로 돌아갔다.
곧이어 9월 전패(殿牌)까지 헐어버렸다는 소식에 단식으로 자결했다. 단식을 시작해 죽을 때까지 자명(自銘) 등 여러 편의 시를 지었다. 류도발은 단식하는 동안 유서 및 시를 통해 “종묘가 훼철되었는데 사묘(社廟)를 옛날대로 봉안하는 것은 크게 편치 못한 것이다. 진작 신주(神主)를 묻어 광복(光復)이 되는 날을 기다리는 것이 가하다”며 당부를 남기기도 했다. 1951년 안동의 유지들이 사회장을 지내고 화산(花山)에 이장했으며, 진안(鎭安)의 이산묘(餌山廟)에 배향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류도발 선생의 아들인 류신영 선생역시 독립운동의 DNA가 남다르다. 그의 본관은 풍산(豊山)이며 자는 경천(敬天), 호는 하은(霞隱)이다.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의 후손으로 학문을 중시한 집안에서 가학(家學)으로 공부했으며 을미의병 때 의병으로도 활동한 바 있다.
1910년 아버지의 순절을 지켜보는 아픔을 겪은 류신영 선생은 1919년 1월 21일 고종이 서거했다는 소식을 듣게 됐다. 이에 그는 눈물을 흘리면서 “500년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이 이로부터 무너지려하는가?”라며 탄식했다. 고종 인산(因山)에 참예하고 돌아와 독약을 마시고 자결했다.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