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장군 탄신 478주년 특집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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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터넷편집부
  • 승인 2023.03.14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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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8일은 무슨 날? 성웅 이순신 탄신일!
탄생일 배경과 생애, 불패신화를 이룬 전투 알아보기
거북선과 이순신 장군 

성웅은 거룩한 영웅, 뛰어난 영웅을 나타내는 말이다. 우리나라에서 성웅이라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인물이 있다. 바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다. 오는 428일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태어난 날이다. 본지는 이순신 장군 탄생일 478주년을 맞아 이순신 장군에 대해 알아보았다.     -편집자주-

 

 

광화문에 있는 이순신 장군 동상 

 

충무공 탄신일

성웅 이순신 장군을 기르는 날은 조선시대부터 있어 왔다. 충무공의 충의를 기르는 행사는 조선 정조 때부터 시작되어 일제강점기를 거쳐 이루어져 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지면서 서서히 기념일의 행사는 치러지지 않았다.

1960년대 초에 박정희가 대통령이 되면서 충무공 탄신일 행사가 적극 추진됐다. 1968년 서울 광화문에서 충무공 동상이 세워지고, 현충사 성역화 사업을 추진하는 등 충무공 현양 및 추모사업이 활발하게 이뤄졌다.

충무공 기념일 행사는 국방부가 주도적으로 진행하는데, 주축은 해군이다. 해군은 행사 당일 기항 중인 함정마다 만항식을 거행해 성웅의 탄생을 경축하는 한편, 부대별로 충무공 유적지 참배, 마라톤 등을 실시하며 성웅 이순신 장군의 충의를 기르고 있다.

 

이순신 장군 초상화

이순신의 생애

1545년에 태어난 이순신은 서울 건천동에서 태어났다. 사람들 중 충남아산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정보이다. 충남 아산은 이순신 장군이 묻힌 곳이다.

임진왜란의 영웅 이순신 장군은 스스로에게는 엄격하고 진실 되게 행동하며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이러한 성격 덕분에 주의 사람들의 모함과 눈총을 많이 받았다. 그렇지만 노력을 빛을 발해 해군 최고의 지역 방위 사령관의 자리인 수군절도사까지 올랐다.

옥포해전을 시작으로 하여 처음 거북선이 등장한 사천포해전, 부산포해전, 명량해전 등 다양한 해전을 승리로 거두었다.

전투를 임하는데 있어서 질 수도 이길 수도 있는데 이순신 장군은 수 십 번의 전투를 임하면서 모조리 다 이겼다. 정말 대단한 인물이다. 이렇게 이길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나라를 사랑하는 정신을 토대로 백의종군이 되었을 때에도 전투에 임하여 승리로 이끌었고, 총탄을 맞았을 때, 군사들의 사기가 떨어져 전쟁에서 질까 봐 알리지 말라고 한 희생을 감내하는 정신과 다양한 전략과 전술을 통해 승리를 할 수가 있었다.

이순신 장군은 스스로에게 엄격하여 갖은 불운을 겪었음에도 명장이 되었다. 28세라는 늦은 나이에 무인 선발시험에 응시하였지만 말이 거꾸러지고 바람에 말이 떨어져서 실격하고, 4년뒤에야 관직에 나갔다. 32세라는 늦은 나이에 말이다.

이순신은 임진왜란 도중 시기 질투의 모함에 의해 수군절도사라는 최고의 자리에서 가장 밑바닥인 백의종군의 자리까지 내려왔다. 엄청난 수모를 겪었음에도 이순신은 능력을 인정받고 다시 전쟁터로 돌아가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이순신 장군 대표 대첩을 소개하는 자료 

불패의 전투

이순신 장군은 자신이 치룬 모든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게임도 아니고 말이다. 정말 대단하다는 말 밖에 나오지 않는다. 불패의 이순신 장군의 전투는 노량해전, 사천해전, 웅포해전 등 다양하다. 유명한 해전들을 몇 가지 뽑아 알아봤다.

옥포해전

옥포해전은 임진왜란 초기에 일어난 해전이다. 이 해전은 원균이 이순신에게 구원을 요청하여 벌어지며 진행되었다. 이순신은 휘하의 판옥선 24, 협선 15척등을 이끌고 당포 앞바다에서 합세하여 옥포에서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다. 이 싸움의 결과는 아군에게 별 피해 없이 적선 26척을 격침하는 큰 전과를 올리는 승리한 전투였다.

충무공 이순신 생가터 안내표지판
 난중일기 
이순신 장군 대검

한산도대첩

159278일 한산도 앞바다에서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을 크게 무찌른 전투로 진주대첩, 행주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 대첩으로는 불리는 전투이다.

한산도 대첩은 일본이 이순신 장군에게 패배한 것을 만회하기 위해 이루어진 전투로 왜장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수 십대의 배를 이끌고 조선 앞바다에 들어오면서 진행되었다.

이순신 장군은 수로의 폭이 좁고 암초가 많아 공격하기 곤란하다고 판단하여 전략상 유리한 한산도 앞바다로 적을 유인한 후 그 유명한 학익진 전법을 통해 적들을 맞서 싸웠다.

전쟁의 결과 층각선 7, 대선 28, 중선 17척등 많은 수의 배를 격파하였고, 왜군 장수 와키자카는 목숨만 간신히 부지하며 일본으로 돌아갔다.

 

명량해전

이순신 장군의 명언인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있습니다 라는 유명한 말을 사람들은 알고 있을 것이다. 이 말이 나온 전투가 명량해전이다.

15979월 명량대첩이 일어났다. 원균이 칠천량 전투에서 패배함으로써 백의종군의 신분이었던 이순신은 다시 삼도수군통제사에 올라서 싸운 전투이다. 명량대첩에서 이순신 장군은 단 12척의 배로 왜군 133여척과 싸워 왜군의 배들을 격침시켜 돌려보냈다. 배가 넘는 전력인데도 불구하고 전술로 인해 이긴 엄청난 전투이다.

 

노량해전

159811월에 노량진 앞바다에서 일어나 해전이 노량해전이다. 이 해전을 끝으로 7년이나 지속되었던 조선과 일본의 전쟁이 끝난 전투이다.

이순신에게 계속하여 패배한 왜군은 이순신을 잡을 목적으로 총 공격을 감행하였다. 이순신 장군은 아랑곳하지 않고 적선의 퇴로를 막고 이를 공격하여 격파하였다. 이 해전에서 400여 척의 전선을 격파당한 왜군은 남해 방면으로 도망쳤으며, 이순신은 이들을 놓치려고 끝까지 추격하였다. 이 과정에서 안타깝게 이순신 장군은 적의 유탄을 맞아 전사하였다. 여기서 이순신 장군은 자기의 죽음을 알리지 말고 추격을 계속하라고 말을 하였다. 노량해전은 자신보다 나라를 생각하여 행동한 이순신 장군 덕분에 마지막까지 승리 할 수가 있었다.

정말 많은 전쟁을 겪으며 모든 전투를 승리로 이끈 이순신 장군은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칭송받아 마땅한 분이다. 삼도수군통제사라는 높은 위치에 있든지 백의종군이라는 낮은 위치에 있든지 항상 나라를 생각하여 적과 맞서 싸운 이순신 장군은 가히 성웅이라고 불리기에 충분한 인물이다.

유정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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