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I 최기숙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HK교수
칼럼I 최기숙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HK교수
  • 편집부
  • 승인 2015.07.15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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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는 신분제 사회인가

사람을 대하는 것과 사람을 다루는 것

 

사람을 대하는 것과 다루는 것은 어떻게 다른가? 그것을 알아차리는 것은 주체가 아니라 대상이다. 상대방과 인격적 관계를 맺는다고 생각하며 지내다가도, 어느 순간 자신이 기계나 물건처럼 다뤄진다고 느껴질 때에, 존엄성은 훼손되고 깊이 상처받게 된다. 왜냐하면 사람은 그 어떤 순간에도 사물이나 동식물과는 다른, 인간으로 존재하려는 성향을 지녔기 때문이다.

이것은 성희롱이나 성폭력이 인지 주체의 감성적 자각에 의해 판단되는 것과 유사하다. 아무리 그(녀)가 본의가 아니었다고 주장해도, 상대방이 모욕감을 느꼈다면 폭력이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인격적 관계는 빠르게 추락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자존감이 상처받는 바로 그 순간, 자신이 언제 어느 때라도 사람으로 존재하기를 욕망하고 기대하고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 수치심 때문에 상처받지만, 인간으로 존재하려는 자신과 만났기 때문에, 그 순간은 성스럽고 숭고하다.

그러나 아프니까 청춘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숭고하니까 상처받는 거라는 말은 필요치 않다. 상처를 주는 존재가 눈에 보이는 분명한 어떤 이가 아니라, 조직이나 기관, 그도 아닌 현대 사회 그 자체라고 해도,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는 행위의 부도덕함에 대해 면죄 받을 수는 없다. 그 누구도 인권의 이름으로 상처받지 않을 권리와 자격이 있기 때문이다.

위계화 사회, 위험과 불안의 신호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지 않고 ‘다루려는 태도’가 생성되고, 또 당사자에게조차 용인되는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매개되어 있다. 그중에서 가장 큰 요인은 관계의 역학과 위계일 것이다.

몇 년 전에 ‘무한도전’에서 멤버들이 조선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설정을 하고, 신분에 따라 옷을 입고 서울 한복판에서 추격전을 벌인 적이 있다. 그때 광대 옷을 입은 멤버가 행인을 붙잡고 직업을 물었다. 그는 회사원이라고 말했다. “지금이 조선 시대라면 회사원의 신분은 뭡니까?”라고 묻자, 그는 ‘노비’라고 대답했다(기억을 더듬은 것이라 주고받은 대사가 정확하지 않을 수 있겠다). 무덤덤한 어조의 짧은 답변이었지만 의표를 찌르는 한 마디가 시청자의 깊은 공감을 샀다. 예능 프로였기 때문에 농담으로 넘겼지만, 그 말이 담고 있는 부정당함, 억울함, 부조리에 대해서 집단적인 공감대가 생성되었음은 분명하다.

21세기는 신분제 사회인가? 법적으로 본다면 신분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명백한 민주주의, 평등사회다. 그러나 문화적으로나 감성적으로, 수많은 사람이 시시때때로 부당한 신분적 위계 때문에 상처받고 있다. 가끔씩 언론에 회자되는 몇 건의 눈에 띄는 사건에 대한 폭발적 반응은 단지 잠재된 집단 감성에 불을 붙인 도화선을 지켜본 것에 불과하다.

사람을 대하는 예절, 배려의 덕목과 교양

18세기 문인 이덕무가 쓴 〈사소절(士小節)〉은 선비의 소소한 예절이라는 의미를 담은 작은 책이다. ‘선비의 범절(士典)’, ‘여자의 의례(婦儀)’, ‘어린이의 규칙(童規)’ 등 세 부분으로 편집되었다. 성인 남녀와 아동이 지켜야 할 일상생활의 매너가 적혀 있다.

(중략)

일상생활에서 지켜야 할 사소한 예절을 사례별로 빼곡하게 적었다. 글을 통해 본다면, 이덕무는 섬세한 인성의 소유자이며, 박학다식한 지식인이다. 시와 그림, 밀랍 조각에도 능했던 예인이기도 하다. 서얼 출신이라 널리 등용되지 못했지만, 규장각 검서관으로 일하며 장서를 마음껏 읽었다. 조선의 문인은 물론, 청나라 지식인과도 교류하며 글 쓰는 일을 했다.

그가 예의범절에 관해 소소한 사례를 들어 서술한 것은 신분제가 철저했던 조선 시대에 서얼로 살아가면서 체감한 상처를 스스로 치유하고, 그 힘을 널리 전파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희망, 인간됨의 의무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는 법은 어려서부터 훈련을 통해 몸에 익혀야 하는 사회구성원으로서의 의무다. ‘투명하게’ 작동하는 ‘신분제’와 ‘위계화’의 모순은 스스로를 뼈아프게 성찰하려는 ‘인간다움의 훈련’을 통해서만이 자각할 수 있고, 교정할 수도 있다(도대체 무의식을 교정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자각과 인정이다). 성찰이란 그것이 부든, 지식이든, 지위나 권력이든, 교양이나 연령, 성별이나 인종이든, 모든 권한을 ‘가진 자’의 역사적이고도 사회적인 의무다. 사회 변화를 위한 제도적 개선에 앞서, 일상에서의 책임감 있는 처신이 중요하다고 보는 것은, 한 걸음의 변화가 갖는 나비 효과와 같은 힘을 믿기 때문이다. 제도가 바뀐 다음에 태도를 바꾸는 것이 효과의 측면에서는 더 클 수 있지만, 엄밀히 본다면 그 또한 제도에 대한 개인의 복종에 불과할는지 모른다. 일상에서 주체의 자각과 변화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것이야말로 어쩌면 인문학이 갖고 있는 마지막 희망일 것이다. 그 희망을 끝까지 버리지 않는 것이야말로 ‘언제나 사람으로 존재하려는 이’가 지켜야 할 최전선의 의무가 아닐까, 여름 햇살만큼 따가운 일상의 감각을 스쳐 지나며 생각해 보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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