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1] 우리의 자랑 ‘한양도성과 중구의 각자성석’
[연재1] 우리의 자랑 ‘한양도성과 중구의 각자성석’
  • 인터넷편집부
  • 승인 2018.03.22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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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성도
도성도

서울의 중심인 중구는 한양 천도(1394년)이래로 서울 속의 서울, 역사와 문화가 살아 숨 쉬는 수많은 문화유산으로 과거의 역사가 아니라, 현재에서 미래로 이어지는 자랑스러운 도시이다. 한양도성은 단순한 도성차원을 넘어 조선시대 태조, 세종 대에 우리 선조들께서 농한기 엄동설한에 수십 만 명이 동원되어 축조된 도성으로 성돌 하나하나에 선조들의 애환이 서려 있는 귀중한 문화재로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본지는 이에 우리 선조의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이자 중구의 대표 문화재인 한양도성과 중구의 각자성석에 대해 최근 지방문화원 원천콘텐츠 발굴지원사업의 일환으로 발간된 ‘한양도성과 중구의 각자성석’자료를 연재로 담아보기로 했다.
1. 조선왕조 500년의 역사를 쌓다
오늘 날의 서울은 조선왕조 500년 역사가 현재와 함께 숨 쉬는 역사의 도시이자 문화의 도시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할 수 있는 것은 오랜 세월 자리를 지켜온 한양도성이 있기 때문이다. 한양도성은 곧 조선의 도읍이었고, 조선의 수도 한양을 지켜온 성이었다. 그리고 도성민의 삶을 지켜온 울타리였다. 1392년 고려 멸망 후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왕위에 오르자 산세가 빼어난 길지인 한양으로 천도를 추진했다. 산과 강으로 이뤄진 지형이 빼어난 한양은 전국의 중심에 자리해 행정력을 남북으로 고루 미칠 수 있고, 지류가 발달한 한강이 흐르고 있어 수로와 육로 교통도 이로웠다. 사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군사적으로 유리하고, 백성들이 살기에도 좋았다. 이는 도읍으로서의 조건을 갖춘 것이었다. 한양천도를 결정한 태조는 1394년 9월 1일 새도읍의 궁궐을 위해 신도궁궐조성도감을 설치했다. 궁궐은 남경때 지은 행궁이었으나 터가 좁고 답답해 그 남쪽에 새로이 터를 잡고 지었다. 이 궁궐이 조선의 정궁 경복궁이며, 그 좌우로 종묘와 사직을 두었다. 두 번에 걸친 공사에 동원된 양인은 전국에서 모두 19만 7,470명이었다. 1차 공사에 11만 8,070명, 2차 공사에 7만 9,400명을 동원했는데, 천도를 할 즈음 한양의 호구수가 수천에 불과했으니 실로 엄청난 백성들을 동원한 것이다. 도성의 인구는 세종 대인 1428년까지 10만 3,328명이었다. 1차 공사에 동원한 백성들보다 인구가 적었던 것이다. 이를 보면 도성 공사가 얼마나 큰 대역사였는지를 간접적으로 알 수 있게 한다.  

자료 출처: 서울중구문화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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