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기획- 서울의 중심 중구의 역사 17
특집기획- 서울의 중심 중구의 역사 17
  • 인터넷편집부
  • 승인 2020.07.31 10:5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중구 동네방네 이야기 시리즈

본지는 올해 창간 27주년을 기념하여 지난해부터 세계적인 도시로 발돋움하고 있는 서울시의 역사를 총 네 차례에 걸쳐 재조명해보았다. 서울 역사 고증 활동에 탄력을 받은 본지는 이번에 더 세부적으로 들어가 서울의 중심도시로 자리매김한 중구의 역사를 동별로 묶어 소개해보기로 했다.

남산의 명물로 자리한 교통수단 ‘남산케이블카’
남산의 명물로 자리한 교통수단 ‘남산케이블카’

 

3장 명동권역

(지난 호에 이어)

16. 남산동1(南山洞一街)

또한 나대장골과 이어진 남산동22번지에 호위청(扈衛廳)이 있었으므로 이 일대를 호위청동, 호위청골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조선 실학가로 해동역사(海東繹史)를 편찬한 한치윤(韓致奫)도 나동에 살았다. 남산동1가는 일제강점기에 회현동, 필동, 충무로 등과 같이 일본인들이 주로 거주하던 지역이었다. 현재 정화예술대학교, 퀼트박물관 등이 자리하고 있다.

 

17. 남산동2(南山洞二街)

퇴계로 남쪽, 지하철 4호선 명동역 2번과 3번 출구에서 소월길까지를 아우르는 남산기슭에 위치하는 남산동2(南山洞二街)는 조선시대 초기 한성부 남부 명례방에 속했던 곳으로 일제강점기에 남산정2정목(南山町二丁目)으로 불리다가 1946101일 일제식 동명을 우리말로 바꾸면서 남산동2가로 되었다. 남산동이라는 동명은 이곳 일대가 남산 북쪽의 기슭아래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예부터 남산골이라고 불리던 데에서 유래하였다. 남산동에서 시작하여 구리개를 지나 청계천으로 들어가는 남산동천이 있었다.

남산동2가는 남산으로 오르는 진입로이며 동으로 남산동3가와 접하고 남쪽으로는 예장동과 인접한 지역이다. 서쪽은 회현동1가와 남산동1가로 에워싸여 있고 북쪽은 퇴계로를 사이에 두고 충무로1가와 마주보고 있다. 남산의 북쪽 산자락에 위치하고 있는 남산동2가는 퇴계로를 중심으로 일본인들이 일찍부터 근거지로 만들었던 까닭에 남산동일대에서는 가장 번잡한 지역이었다. 필동과 경계가 되는 소파길이 개통되기 전만 해도 퇴계로로 통하는 길이 유일한 통로였으나 지금은 비교적 사통팔달한 교통망을 보유하고 있다. 더구나 남산에 주요 국가기관이 자리하면서 만들어진 외교구락부는 이 나라 정치외교 부문에 커다란 변혁을 가져오게 하는 만남의 소였다. 명승으로 꼽는 남산 경관 아래 위치한 까닭에 예부터 시인 묵객들의 사랑을 받아왔을 뿐만 아니라 현대사를 장식하는 많은 외국인이 이 일대를 찾았다.

남산동240번지 일대를 옛날에는 삼아동(三丫洞)이라고 불렀는데, 이 마을의 바위에 삼아동이란 세 글자가 새겨져 있었던 데서 유래한 것이다. 삼아동 아래에는 물이 달고 찬 암천(岩泉)’이라는 샘이 있었는데, 이 샘가의 암벽에도 아계(丫溪)’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남산에는 특히 많은 약수가 있었다.

남산 자락에서 바라본 남대문2가 전경
남산 자락에서 바라본 남대문2가 전경

그중 와룡암(臥龍庵) 아래에 있는 속칭 부엉바위 약물이라고 불리는 휴암약수는 절벽 사이를 흘러내리는 약수터로 여름철에는 피서를 하거나 산책하는 사람들의 발길이 끓이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인근에 세워져 있던 천석각(泉石閣)이라는 누각은 피서하기에 아주 좋은 곳으로 이름나 있었다. 옛 문헌에도 이러한 사실들을 기록하여 휴암천은 목멱산 아래 있고 삼아동의 물맛도 달고 차다고 하였다. 곧 삼아동의 물맛이 가장 품격이 높다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휴암천과 가까이 있음을 암시해주었던 것이다. 또 허정(許井)이라 불리는 우물이 있었는데, 이는 옛날 남산 위에 있던 목멱신사(木覓神祠)에 제사 드릴 때 쓰던 우물이라고 한다. 이곳에는 묘소에 세우는 것과 같은 석인상(石人象)이 있었다고도 한다.

남산동 249번지에는 복천암(福泉岩)’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바위가 있었다. 이 일대 또한 옛날부터 명승지로 유명하던 곳으로 조선 말기의 덕망 있는 대신 경산(經山) 정원용(鄭元容)이 정계의 여러 명사들을 초청하여 하루를 즐기면서 이곳의 풍경을 시로 표현하기도 하였다. 윤달이 낀 어느 봄날 복천암에 모여 무르익은 봄날의 흥취를 그는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남산 밑 우리 집엔 봄만 되면 경치도 좋아.

마음 내키면 술 한 잔 들고 승경 찾아 산책도 하네.

숲속을 거닐다 흥 절로 나면 노래 부르고 시로 읊는데 시내 따라 방초로(芳草路) 거닐면 어느 사이 삼차동(三叉洞) 지난다네.

 

삼차동(三叉洞)은 곧 삼아동(三丫洞)을 말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남산동22번지에는 옛 호위청(扈衛廳) 터가 있었다. 호위청은 인조반정(仁祖反正) 후의 흉흉한 민심에 대비하여 궁궐을 경호하던 기관으로, 훈신(勳臣)이 대장으로 임명되었다. 소파길 아래 남산동 226번지에 있는 외교구락부는 지난날 정치외교계의 인물들이 만나는 장소이기도 하였다.

한편 지금의 서울특별시 중구 퇴계로2056(남산동226-8)에는 교서관이 있었다. 교서관(校書館)은 조선시대 경서(經書)의 인쇄나, 제사 때 쓰이는 향()축문(祝文)인장(印章) 등을 담당하던 관청이다. 조선의 건국과 함께 고려의 제도를 계승하여 교서감(校書監)을 설치하고 서적과 축문 관련 업무를 관장하게 한 것이 교서관의 시작이다. 일명 운각(芸閣), 내서(內書), 외각(外閣) 등으로 불리었다. 교서관은 설치 당시에 교서감이라 불리었고, 태종 때에 명칭이 교서관으로 바뀌었다. 세조 때에는 전교서(典校署)로 불리다가 1484(성종 15)에 교서관으로 개칭되어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등재되었다. 원래 교서관은 남부 훈도방(薰陶坊)에 위치해 있었는데, 지금의 중구 남산동2가 전 외교구락부 인근에 해당한다. 병자호란 뒤에 중부 정선방(貞善坊)으로 옮겼다가 후기에는 남부 낙선방(樂善坊)으로 이전하였다.

교서관의 관원들은 모두 문관이었으며, 전서체에 익숙한 3인을 품계에 따라 겸임하도록 하였다. 교서관의 판교(判校) 1인은 타관이 겸하고, 교리(校理) 1인과 별좌(別坐) 2인을 비롯 각급 직제에 걸쳐 모두 20여 명이 소속되어 있었다. [자료제공: 중구문화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